김구림展

KIM KU LIM

2013-09-02 - 2013-10-02

김구림의 '해체'

1) 들어가는 글
대학을 다니던 1970년대 중반 나는 김구림의 작품을 본 기억이 있다. 당시 나는 장욱진의 그림을 좋아하였고 천경자의 전시를 자주 보았으며, 또한 박서보등의 단색조 회화가 화랑가를 중심으로 활발하게 유통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이때 접한 김구림의 작품은 나의 흥미를 끌었는데, 무엇보다도 그것은 ‘다름’ 때문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의 작품이 달라 보였던 것은 당대 주류와의 차이에서 기인한다. 우리 현대미술사에서 1970년대를 추상회화로 대변되던 모더니즘의 전성기라 한다면, 김구림은 그러한 주류 바깥에 있었으며 따라서 그의 작품이 매우 다르게 보였던 것이다.
나는 그의 다름에서 최근에 접한 ‘해체주의(deconstructivism)’와 같은 국면을 발견한다. 그의 작업은 해체주의자, 특히 그 전형이라 할 수 있는 자크 데리다(Jaques Derrida)의 사유방식을 드러내는 도해와도 같이 보이는 것이다. 물론 김구림은 해체주의도 데리다도 모르며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주목할 만한 점은 일관성이 없는 김구림의 작업에서 발견되는 하나의 일관성이라면 근대철학과 그것이 궁극인 모더니즘의 틀을 깨는 측면이 두드러지며, 바로 그 점이 최근의 해체적 경향들과 같은 지평에 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근대화 시기였으며, 우리 미술에서 모더니즘 시기였던 당대에 끊임없이 그것들과의 다름을 견지한 김구림의 작업이 서구 근대철학에 전면 도전한 해체주의와 상통함은 우연만은 아닐 것이다.
‘해체주의(deconstruction)’란 한마디로 플라톤 이후 서양 정신사의 골간이 된 사유의 방식, 특히 로고스 중심주의를 깨는 것이다. 해체주의자들이 글로 해체하였다면 김구림은 형상으로 해체한 것인데, 따라서 나는 해체주의자의 ‘글’을 빌어 그가 많든 ‘형상’을 설명해 보고자 한다. 당여한 말이겠지만, 그것은 그이 작업에 접근하는 ‘하나의’ 통로일 뿐임을 밝혀 둔다. 미술과 철학은 각기 고유한 의미체계를 가지고 있어서 교환이 불가능한 부분이 있음은 당연한 전제다.
따라서 김구림의 작업에는 해체주의로 설명할 수 없는, 심지어 그에 반하는 국면 또한 발견할 수 있을 것인데, 여기서는 단지 김구림의 작업과 해체주의가 공유하는 부분을 주시하고자 한다.
김구림의 작업과 해체주의가 만나는 지점은 그대철학에서의 ‘의미화(signification)’ 의 방법 자체를 문제 삼는 점에 있다. 해체주의자들은 단일하고 일관된 주체가 발화하는 기회가 단일하고 일관된 의미를 담지하며, 이를 또 다른 단일하고 일관된 주체가 수용한다는 근대적 사유방식의 대전제를 흔든다.
그들은 ‘동일성(identity)’의 논리를 부정함으로써 의미화의 과정 자체를 해체한다.
김구림의 작업 또한 이러한 성향을 보여준다. 그의 작업이 당대의 주류와 다른 점은 다른 의미를 담은 다른 시각기호를 만들어내는 점에 있는 것이 아니라 기호가 의미화하는 과정을 다르게 이끄는 점에 있다. 그의 방법은 한마디로 어떤 것이 아닌 것을 말하는 것, 즉 ‘부정(negation)을 통한 사유’ 혹은 김형효가 말한 빼기의 철학이다. 단색조 화가 등 당대 주류가 만들어낸 기호가 ‘미술은 이것이다’라고 말한다면 김구림의 것은 ‘미술은 이것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셈이다. 그는 동일성의 끈 자체를 끊어 놓고 있는 것인데, 따라서 그런 발화는 끊임없이 지속될 수밖에 없으며, 의미는 무한히 지연된다. 그런 의미는 근대적 사유방식에서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므로 그런 의미화의 방식은 의미의 해체에 다름 아니다.
김구림의 이런 해체적 성향은 1970년대에만 국한되지 않고 1960년대 중엽부터 현재에 이르는 그의 전 경력에 걸쳐 있다. 따라서 모더니즘을 모범으로 삼은한국 현대미술에서 김구림이 항상 바깥에 위치해 온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특히 1970년대는 모더니즘 경향이 주류를 이루며 미술계의 표면에 부상하였으므로 그의 다름이 더 두드러지게 보였다. 따라서 이 글은 그의 전 경력을 포괄하되 자연히 1970년대의 작업을 많이 언급하게 될 것이다.
해체철학이 아닌 김구림의 작업이 주제인 본 글에서는 그의 작업을 설명하기에 유효한 몇 가지 개념만을 빌려 오고자 하는데, 그것에 가장 적절한 것으로 데리다의 어휘들을 사용하고자 한다. 데리다는 철학의 도구인 언어 자체를 해체 한, 따라서 형이상학의 뿌리를 흔들어 놓은 가장 근본적인 해체주의자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는 또한 해체를 무엇보다도 공간예술에서 목격한 사람이기도 하다. 그는 해체를 끊임없이 자기동일성을 지워 가는 “공간두기(spacing, 1'espacement)"라고, 하면서 자신의 글도 공간적으로(또는 건축적으로) 기술할뿐만 아니라 건축, 조각, 회화 등 공간예술에 특별한 관심을 가졌다. 공간두기는 특정한 공간에 대한 구체적인 경험을 통해 가장 잘 드러날 것이기 때문이다.
데리다에게 있어서는 모든 것이 해체이지만 공간예술은 그런 양상이 더 잘 눈에 띄는 예이고, 또 나에게는 그 중에서도 김구림의 작업이 적절한 예로 생각되는 것이다.
데리다의 글이 그렇듯이, 해체는 분석과 종합을 거부하는 것이며 따라서 해체를 말하는 글 또한 분석과 종합을 비껴가는 의도적인 순환론이다. 김구림의 작업 역시 발전의 단계를 밟기보다 모든 것이 서로를 반영하며 순환한다. 그러나 나는 해체를 분석과 종합이라는 반-해체적 방식으로 설명하는 모순을 받아들이고자 한다. 그것은 그래야 의미가, 해체의 의미마저도 전달되리라는 믿음 또는 편견을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며, 기존의 글쓰기 방식을 벗어나지 못하는 나의 한계 때문이기도 하다.
다음에서는 불가분리의 것으로 얽혀서 순환하는 김구림 작업 속의 작가 주체, 작품 그리고 예술개념이라는 측면을 의도적으로 분리하여 각각의 해체적 양태를 밝히고자 한다. 그것은 주로 주체와 작품, 기표와 기의, 표본과 개념 사이의 동일서의 고리를 풀어 놓는 국면을 살피는 일이 될 것이다.

2. 예술가 주체의 죽음
“작가는 죽었다. - 우리는 그 또는 그녀가 누구인지조차도 모른다. - 그러나 그것은 [잉여물로서] 남아있다.”
김구림의 전 작업경력은 한 작가의 것이라고 믿어지지 않을 만큼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또한 그 작업들 사이에도 일관성이 없다. 평면과 입체작품, 오브제작업, 판화, 도자, 자수, 염색, 사진, 비디오, 설치, 대지미술, 퍼포먼스, 메일 아트, 무용, 영화, 무대미술과 의상 등 그에게는 건드리지 않은 영역이 거의 없다.
이질적이고 단절된 기호들 사이를 떠도는 그의 작업목록은 작업 배후의 ‘유일한 저자’의 존재를 추적할 수 없게 한다. 작품과 작가를 이어주는 연결고리가 풀어진 그의 작업은 일관된 존재로서의 작가 개념을 부정하는 것이다. 일정한 방향이 없이 다양한 페르조나들 사이를 순환하는 김구림은 개인양식을 축으로 선적인 진화의 논리에 따라 자신의 존재를 일관되게 각인시켜 가는 모더니스트 예술가상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 “무명구조(無名構造)로서의 예술”을 지향한다는 작가 자신의 말처럼 익명으로 작업하기를 자처하는 그는 해체주의자들이 선언하는 ‘주체(또는 작가)의 죽음’을 시연한다.
김구림은 ‘차용’의 기호들을 만들어냄으로써 일관되고 유일한 예술가 주체의 ‘현준(presence)’을 해체하는 셈인데, 이런 그의 태도는 현존의 철학에 기반한 당대 단색화 작가들의 것과는 매우 ‘다른’ 지점에 있다. 단색 화가들이 자신의 현존을 증거하는 기호들을 만들어내고자 한다면, 김구림은 오히려 자신의 부재를 확인하게 하는 기호들을 만들어낸다. 단색 화가들은 똑같은 작품들을 반복함으로써 일관된 작가 존재를 각인시킬 뿐 아니라, 특히 예술가의 ‘몸’의 지표(index)를 통해 예술가의 현존을 표상하고자 한다. 이에 비해 기구림의 작품은 그런 몸의 불가능성을 말한다. 단순한 예로 단색화에서 예술가의 몸의 기호로 사용되는 자발적인 붓질이 김구림의 작업에서는 그것을 배반하는 기계적선이나 객관적인 문자, 기계적으로 만들어진 오브제와 병치되어 그 현존 효과가 말소된다. 그는 데리다가 말한 몸의 ‘비현존(nonpresence)’, 즉 동일화의 불가능성을 그림으로 보여주는 셈이다.
데리다에 의하면, 현존의 효과를 주는 것 같은 반 고흐의 붓 터치는 고흐의 몸과도 고흐와도 동일시 할 수 없다. 반 고흐는 자신의 몸을 행위하는(perform)과정에서 끊임없는 탈구(dislocated)되므로, 몸은 현존이 아니고 프레임(frame)의 경험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예술가의 몸이 현존하고 또한 작품이 현존한다고 상상하는데, 그런 상상은 단지 사물들을 고정시키려는 잠정적이고 불안정한 시도인 셈이다. 오히려 그것은 사물들의 응집 불가능성, 그것에 대한 두려움을 재현한다. 따라서 데리다의 말처럼 “현존은 죽음을 의미할 것이다. 현존이 가능하다면…반 고흐도 반 고흐의 작품도, 반 고희의 작품에 대한 우리의 경험도 없을 것이다.” 만약 그런 것들이 가능하다면, 그것은 “현존이 그곳에 존재하면서 수렴되지 못하는 한 에서이다.… 그곳에 있음(the being there [l'etre-la])은 오직 이런 흔적들의 작용이 그 자체를 탈구시키는 근거 위에서만 가능하다.”
김구림이라는 작가가 있다면 그것은 자신을 끊임없이 탈구시키는, 즉 자신의 현존을 부정하면서 지속적으로 리프레이밍하는 행위를 통해서다. 작가는 해체된 또는 해체될 잉여물(remains)인 셈이다. 화면 내에서 병치된 형상들의 이질성과 작품과 작품 사이의 불연속성으로 이루어진 김구림의 작업은 그 잉여물의 기호다. 죽은 또는 없는 작가를 되살려내려는 단색 화가들에 비해, 김구림은 그 작가으 현존 불가능성을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그에게 예술가 주체는, 데리다의 말처럼 “스스로 나누어짐으로써, 스스로 공간을 둠으로써, 대기함으로서, 스스로 지연됨으로서만 구성된다.”
이러한 주체는 말과 사유와 존재를 하나로 본 전통 철학의 여백에 제쳐진 주체다. 김구림에게 있어서는 작품이 곧 생각이 아니고 생각이 곧 작가가 아니다.
그의 작업은 이들 사이에 ‘거리두기’인 셈인데. 그 거리를 이루는 것은 ‘맥락(context)’이다. 예술가 주체는 맥락 속에서 표류하는 ‘위치들(positions)’인 셈이다. 따라서 작가가 작품에 자신의 이름을 부여하는 서명(signature)은 부서(countersignature)를 전제로 한다. 밖으로부터의 서명인 부서가 안으로부터의 서명을 선행하는 것이다. 작가와 작품은 본래 동일한 것이 아니며, 그 동일성은 미술관이나 미술계와 같은 ‘맥락’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다.
김구림의 말에서도 그런 태도를 엿볼 수 있다. “나는 무엇인가. 그것은 나를 감싸고 있는 모든 존재물이 자극하는 감각의 원소이다. 그것은 내가 너를 보고 네가 나를 느끼는 종횡 지향적으로 보여지는 모습이다.” 또는 “작가는 만드는 사람으로서가 아닌 세계의 한 일부로서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등 그의 언급에서 기호들의 그물망으로 확산된 작가의 위치들을 떠올리게 된다.
그의 언급과 작업은 데리다의 생각처럼, “주체는 기표의 주인도 저자도 아니며… 만약 기표의 주체라는 것이 있다면, 극서은 기표의 법칙을 따르기 위한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같이 김구림이 보여주는 예술가 주체는 맥락(context), 즉 ‘텍스트(text)의 연합(con)’속으로 확산된 주체이다. 모든 일인칭은 하나의 환상(illusion)이며, 모든 근원은 구체적 세계와 동떨어진 추상적 일점에 불과함을 시연하는 것이다.
‘예술가’라는 이름은 가진 다양한 위치들을 옮겨 다니는 김구림은, 모든 주체는 이미 자아를 초월하는 텍스트의 세계에 짜여져 있으므로 독창적 창조란 있을 수 없고, 모든 창조는 사실상 재창조이며 모든 것 다 모든 것의 사본임을 드러낸다. 그는 작업의 주체라기보다 ‘주체 효과(subject-effect)'이다.
짜여진 직품(textile)과 같은 텍스트의 세계에서 예술가 ‘주체(le sujet)’는 단지 그 직물의 감치기(lesurget)'일 뿐이다. 그는 “텍스트 바깥은 없다”는 데리다의 말을 실천하는 셈이다.

3. 차연의 게임
“기표는 자체에 동일한 장소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것은 자기 자리를 결여 하고 있다.”
텍스트의 세계에서는 주체가 일관되고 유일한 현존ㅇ이 아니듯이 그 주체가 만든 기호 또한 일관되고 유일한 어떤 것이 아니다. 주체와 그가 발화하는 기호를 이어주는 고리가 일종의 환상이듯 기표와 기의를 이어주는 고리 또한 환상이다.
김구림의 작품에서도 형상과 그 의미 사이의 고리가 느슨하게 풀려 있다. 작가주체뿐 아니라 그가 만든 기호, 즉 작품 또한 동일성의 신화를 벗어나고 있는 것이다.
김구림은 자신의 작품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나의 사물은 어떤 공간 속에 영원히 뚜렷하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물거품처럼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다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보이는 것 같으면서 보이지 않고 없는 것 같으면서 있는 것 같은 어렴풋한 그 무엇이다.” 그에게 작품 속의 형상들 또는 오브제들은 어떤 것과도 동일화할 수 없는, 즉 의미화 할 수 없는 부분을 포함하고 드러내는, 다시 말해 완결될 수 없는 잉여물이다.
이런 잉여물로서의 기호는 데리다가 말한 ‘문자(gramme)’의 세계에 속한다. 데리다의 해체는 로고스 중심주의의 해체로부터 시작되는데, 그것은 곧 스스로 말하고 듣는 주체의 현존을 전제로 한 전통 형이상학의 말 중심주으를 배격하는 것이다. 그는 현존의 환상을 품기 쉬운 ‘말’이 아닌 그러한 현존을 대신하는 ‘흔적(trace)’으로서의 ‘문자’를 주시하며, 그 문자를 매개로 한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 사유’ 즉 ‘문자학(grammatology, la grammatologie)’을 제안한다. 문자는 ‘같은 것’ 속에 ‘다른 것’을 포함하고 있는 흔적이다. 그것은 약이기도 독이기도 한 ‘파르마콘(pharmakon)’처럼 양면 긍정의 기능을 수행한다. 따라서 그것은 하나의 기의에 수렴하는 대신 끝없이 미끄러져 가면서 서로에게 기대거나 되받아내는 반복운동을 지속한다. 이러한 반복 속에서 “기원의 자기동일성과 살아 있는 말의 자기현존은 사라진다. 사라지는 것은 중심이다.” 이렇게 문자는 말과 달리 끊임없이 자기동일성을 지우는 기표이다. 주체의 죽음은 문자학을 통해 가시화하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의 미끄러짐을 설명하기 위해 데리다는 ‘차연(differance)'이라는 말은 만들어낸다. 그것은 차이와 지연의 합성어로서 공간적으로 서로 다르면서 시간적으로 영원히 미루어지는 기표 등의 끊임없는 유희이자 그런 기표들 자체를 지칭한다. 그것은 기원이나 중심이 없이 무한대로 증식하는 종자의 흩뿌리기, 즉 산종(dissemination)으로서 의미가 아닌 의미효과의 연쇄다. 그것은 남겨지는 동시에 지워지는 흔적이자 그 흔적들의 반복이다. 김구림의 작품은 이러한 차연으로서의 문자인 셈이다. “가령 컵을 그린다고 할 때 나는 컵 자체를 리얼하게 그려 넣는 것도 아니고 추상화시키는 것도 아닌, 이것도 저것도 아닌, 컵 같으면서도 컵이 아닌” 것을 그린다는 작가의 언급은 차연을 말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4. 파레르곤으로서의 “예술”
“자연적인 틀이란 없다. 틀은 있다. 그러나 틀은 실존하지 않는다.” 발화 주체와 발화된 기호(작가와 작품), 기표와 기의(형상과 의미) 사이의 연결고리가 해체된 김구림의 작업은 결국 ‘예술이란 무엇인가’를 묻고 있는 셈이다. 그는 ‘예술임’을 표상하는 매우 이질적이고 다양한 기표들을 끊임없이 만들어내고 병치함으로서 ‘예술’이라는 개념과 그 표본 사이의 끈을 느슨하게 풀어 놓고 있는 것이다. 그는 ‘예술’이라는 범주적 개념에 있어서도 동일성의 고리를 풀어 놓음으로써 그것을 해체하고 있는 셈인데, 이는 특히 기존 예술 개념의 안과 밖을 넘나드는 측면을 통해 노골적으로 가시화한다. 그는 예술과 예술 아닌 것을 구분짓는 경계 위에서 작업하는 것인데, 이런 점에서 ‘틀(frame, cadre)’을 문제 삼은 데리다와 같은 지점에 있다. 그의 작업은 데리다가 말한 ‘파레르곤(parergon)으로서의 틀을 드러낸다. 그 틀의 안고 밖을 넘나듦으로써 그 틀과 그것의 모소성에 관심을 환기시키는 것이다.
데리다는 칸트의 예술론을 해체하면서, “칸트의 예술론이 말하면서 말하지 않는 것… 빚지면서 잊고자 하는 것, 유래하면서 와해되는 곳”으로서의 틀을 문제 삼는다. 칸트의 경우뿐 아니라 근대철학의 사유는 동일성을 확보하기 위한 틀짓기에 다름 아닌데, 데리다는 정작 이러한 개념적 사유의 바깥에 있던 틀을 다시 보면서 그 틀이 파레르콘임을 주목한다. 그 동안 예술작품 또는 그 개념의 변방에 제쳐져 있던 액자와 같은 틀은 ‘에르곤(작품:ergon)’의 부속물이자 장식, 즉 ‘파레르곤(parergon)'인데, 그것은 개념적 시야에 들어오지 않으면서도 그 개념을 닫으면서 열어 놓은 ’만능 열쇠(passepartout)'의 소유자인 유령적 존재라는 것이다. 그는 “파레르곤은… 경계를 조작하고 접근하며 비비고 문지르며 압박한다. 그리고 안이 비어 있는 만큼 안으로 끼여든다.”고 하였다.
그것은 예술의 밖에 있으면서도 안을 만들어내고 또한 안에 관계한다는 것이다.
김구림의 작업은 이와 같이 에르곤과 보충, 대리의 관계에 있는 파레르곤의 모습을 안도 밖도 아닌 또는 안이자 밖인 그것의 위상학적인 애매성을 드러낸다. 그는 기존 예술개념의 경계를 부단히 넘나들면서 그 경계가 예술을 규정지으면서도 또한 가변적이고 임?거인 것임을 노출시키는 것이다.
김구림은 ‘회화, 조각, 설치뿐 아니라 퍼포먼스나 영화를 통해서도 예술’이라는 틀을 해체한다. 그는 각 예술 장르의 벽을 넘나들 뿐 아니라 예술의 안과 밖도 넘나듦으로써 모든 종류의 틀을, 그것의 모호함을 드러낸다. 이러한 그의 작업은 그 틀과 그 안을 가능한 견고하게 지키려 했던 그린버그 식의 모더니즘 강령, 나아가 그린버그가 스스로 자신의 이론적 아버지로 삼은 칸트식의 자율성의 미학과 정 반대의 방향을 향하고 있으며, 그런 면에서 포스트모 더니스트인 셈이다. 그린버그도 언급하였듯이, 칸트의 ‘자기바판(self criticism)’논리는 ‘내재적 비판(immanent criticism)’, 즉 어떤 영역을 평가하고 지키기 위해 그 영역에만 배타적으로 속한 고유한 특성을 규정하고 그 특성을 판단의 기준으로 삼은 사유의 방식이다. 김구림의 작업은 이러한 내부로 향한 사유의 방식에 노골적으로 도전하는 밖으로 향한 사유의 방식이며 그런 면에서 데리다와 같은 지평에 있다.
그는 데리다처럼 틀을 쌓기보다 허물면서 내부를 위협하는 동시에 외부로 시야를 확장한다. 모더니즘 미술이 ‘에르곤’을 주목한다면 김구림은 모더니즘의 자기 규정적 시야의 변방에 제쳐쳐 있던 ‘파레르곤’에 관심을 환기시키면서 에르곤과 파레르곤이 텍스트적 공간의 상대적 위치들일 뿐 절대적인 실체가 아님을 드러낸다. 데리다의 글 ‘파레르곤’에서 본문(에르곤)과 그 중간에 삽입된 불완전한 사각형(파레르곤)의 관계처럼, 모든 것은 “의미론적 고정성을 비웃는 비결정성 안에서 존재한다.”는 존재의 모순에 대한 데리다적 통찰을 김구림의 작업에서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5. 나오는 글
“김구림처럼 이상한 것을 많이 한 작가도 드물다.”는 어느 평자의 소박한 말은 다시 새겨 보면 의미심장하다. ‘이상함’ 즉 ‘다름’을 자처해 온 김구림의 평생 작업은 제도권 미술사의 바깥에서 모든 종류의 틀을 깨는 것에 바쳐져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예술가 주체와 그의 작품, 그리고 예술이라는 개념을 한정해 온 틀과 그것의 절대성을 문제 삼아 온 그의 작업은 미술로 철학하기, 더 정확히는 미술로 ‘해체’ 철학하기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그의 작업은 해체론에 대한 예술이 아닌 “해체론이라는 예술”의 예증이다. 그는 해체론을 예술에 적용한 것이 아니라 작업을 통해 해체를 실행해 온 것이다.
“병이면서 병 아닌”이라는 김구림의 말에서는 해체를 “어떤 함께함(certain being together)을 긍정하는 것”이라고 한 데리다의 음성이 들려오는듯한데, 여기서 우리는 해체라는 ‘비결정’ ‘반진리’의 사유가 가진 긍정적인 지점을 발견한다. 김구림의 작업이나 데리다의 사유방식은 의미로 가득 찬 질식할 것 같은 “세계의 바깥으로의 탈출”을 가능하게 한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순수한 부재”의 세계를 통해 오히려 동일성의 신화에 의해 지워지거나 억압된 것들을 되살리게 된다. 그리하여 크리스티앙 뤼비의 표현처럼 해체는 “차이의 고도(les ilots de la difference)”가 아닌 “차이의 군도(les archipels de la difference)”를 만들어낸다. 다른 것과의 다름을 그 자체로 절대화하거나 실체화하는 각각 고립된 ‘의미들’이 아닌 다른 것과의 접목과 이산의 운동 속에 있는 ‘의미들의 관계’를 생산해 내는 것이다.
이같이 다름을 배제하기보다 그것들을 연결지우면서 끊임없이 관계의 그물망을 만들어 가는 해체의 방법은 서구의 형이상학 전통의 바깥에 있으면, 그런 의미에서 반서구적 이다. 데리다의 말처럼 해체의 대상인 로고스 중심주의가 서구 백인의 형이상학 전통에 공상적 배경을 제공한 ‘백색 신화’인 점에서 해체란 곧 서구적 사유방식의 해체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최근의 연구자들이 데리다의 해체 철학을 노장사상과 연결시킨 것과 어떤 비평가가 동시적 모순을 수용하는 김구림의 작업 태도를 동양적이라고 평한 것이 우연의 일치만은 아니다. 어쩌면 ‘동양적’ ‘한국적’이라는 수사로 치장되어 온 단색화보다 매우 서구적인 외양의 김구림의 작업이 오히려 의미화의 방식에 있어서는 더 동양적인 것일지도 모른다.
김구림은 그 많은 작업을 통해 작업을 하지 않은 셈이며, 또한 작업을 하지 않음으로써 작업을 한 셈이다. ‘해체’도 해체될 것이라는 데리다의 말처럼 김구림의 해체 또한 해체될 것이며, 또한 그러한 해체 과정을 통해 그의 작업은 지속될 것이다. (일부 발췌)

이화여대 미술사학과 교수 윤 난 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