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am

NAM TCHUN MO

2010-08-20 - 2010-09-20

남춘모 - 마음 속의 정묘한 향

1. 그림이 항상 움직인다
그림을 보기 위해 그림 앞에 선다. 그게 일이니 나는 이것을 얼마나 반복해 온 것일까! 화가와는 달리 나는 오로지 보기 위해 그렇게 한다. 대부분의 경우 귀찮게도 나중에 그것을 말로 표현해야 한다. 하지만 볼 때에는, 나중에 그것을 말로 표현하기 위해 보지는 않도록 나름 확실히 자각하면서 보아 왔다고 생각한다. 바꿔 말하면 가능한 한 감각에만 의지하고, 말은 극력 개입시키지 않고 본다는 것이다. 이상이지만.
보통 구상적인(현실 재현적인) 그림이라면 뭔가가 그려져 있으므로 우선 그 「뭔가」가 내 눈을 사로잡는다. 그렇지 않은 추상적인 (비-형상적인)그림이라면 우선 「색채・선・구성」으로 시선이 간다. 어느 쪽이건 그림은 평면이므로 나는 작품 정면 앞에 선다. 남춘모의 작품도 평소처럼 그렇게 대면한 것인데, 형식이 상당히 달랐다. 그의 작품에는 약간이지만 「두께」가 있다. 릴리프적 내지 입체적이라 할 정도의 두께는 아니지만 「고랑」로 이루어져 있으므로 두께가 살아 있다.
그는 천에 폴리에스테르를 입혀 말리고 나서 딱딱해진 그 천을 오목하게 구부린다. 이 U형, 고랑 모양이 된 것을 늘어놓은 것이 작품의 「화면」이 된다. 따라서 이 직각의 U형 「고랑」 정면에 선 내게 그 「능선」은 선으로 보인다. 그와 동시에 (좌우, 상하의)양끝을 향해 각도가 생기므로 그 굴곡도 보인다. 평면인데 평면이 아닌 것, 평면이 아닌데 평면인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색채가 있다. U형 그 자체에 우선 색이 있다. 그것도 흰색이나 갈색계의 소위 「수수한 색」뿐만 아니라 푸른 것, 붉은 것도 검은 것도 있다. 흰색이나 갈색계열의 경우, U형 고랑 한가운데 유색 선이 그어진 경우도 있다. U형 측면만 푸르거나 빨갛기도 하고 아랫면만 검은 경우도 있다. 이 색채 사용의 향연으로 인해 작품도 대단히 다채로워져서 보는 방식도 각양각색으로 변한다. 그 모습은 실제로 작품 앞에 서 보지 않으면 말로는 잘 설명이 되지 않는다. 평면인데 그 평면 위에 약간 두꺼운 공간의 확산이 있다. 그렇다면 평면이 아닌 것인가, 하면 그렇지는 않고 「작품」으로서는 확실히 평면작품이랄까, 그가 시도하고 있는 것은 명확히 회화이다.

2. 실체화하는 「색채와 선」
남춘모의 작품 앞에 선다. 그 때 나라고 하는 한 명의 관객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색채」와 「선」을 구체적인 것으로 체험하는 일이다.
‘회화를 본다’ 함은 보통 하나의 「일루젼」을 얻는 일이며 색채와 선은 그 일루젼을 형성하는 요소에 지나지 않는다. 추상적인 그림의 경우라도 색채와 선은 전체 「구성」을 이루는 중요한 요소이긴 하지만 그 「구성」 자체가 최종적으로는 「일루젼」의 단계로 수렴된다. 즉 「색채」도 「선」도 시종 「일루젼」에서 시작되고 끝난다. 그러나 남춘모의 경우는 다르다. 거기에는 구체적인 「형태」도 없거니와 추상회화적인 「구성」도 없다. 왜냐하면 그의 그림은 소위 계속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다. 부연할 필요는 없겠지만 이는 예전의 「키네틱 아트(Kinetic Art)」와는 완전히 다르다. 「키네틱 아트」는 작품 자체를 움직이거나 움직이는 듯한 착각을 관객에게 부여하면서 철두철미 「일루져니스틱」한 목적과 의도를 가진 예술이었다.
남춘모의 작품을 보면 알겠지만, 그의 그림은 관객의 시선으로 인해 비로서 작품으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관객이 없으면 잠들어 있는 회화인 것이다. 관객이 체험함으로써 작품이 회화가 된다. 게다가 관객이 시선을 움직일 때마다, 신체를 움직일 때마다, 즉 매 순간순간마다 변하는 회화이다. 소위 정해진 모습이 없는 희소한 회화인 것이다. 말하자면 「회화」가 어떤 류의 「애매함」을 끌어안고 있다. 작가가 그것을 의도적으로 바라고 있는 것이다. 그 앞에 서는 관객은 정면에서 보거나 좌우 측면에서 보는 것을 반복하며 비로소 전체를 파악할 수 있다. 관객의 신체와 눈은 필연적으로 소위 동화動画를 촬영하는 것처럼 그의 작품 앞을 왕복한다. 그렇게 해서 얻어진 동영상 같은 것이 말하자면 그의 「작품」, 그의 「회화」이다. 물론 두 번째 볼 때는 첫 번째와는 다른 동영상이 얻어지게 된다. 따라서 이 동영상 같은 것은 본질적으로는 「그 자리에서(in situ)」밖에 체험할 수 없으며, 어디까지나 실제 작품 앞에서만 만들어진다. 이 「애매함」이 재미있다.
남춘모의 그림 형상 자체가 바뀌는 건 아니다. 바뀌는 것은 조명을 예외로 하면 관객이 서 있는 위치와 그에 동반하는 눈에 의한 수용 방식이다. 그렇다고 해서 관객이 그의 작품을 만들고 있다고 말한다면 지나친 표현이다. 그의 「색채」와 「선」이 관객의 시각을 빌리는 것이다. 「색채」와 「선」이 관객의 시각을 빌어서 일루젼이 아닌 하나의 실체적인 것으로 변화한다. 그와 동시에 관객은 일루젼을 보고 있는 줄 알았는데 실은 자신의 시각체험 그 자체가 변화하고 있다. 「본다」고 하는 체험이 뭔가 실체 접촉에 가까운 체험으로 변용한다. 「본다」기보다도 「만지듯 본다」로 변용하는 것이다. 바꿔 말하면 「보는 것」이 본래의 확산을 끄집어내어 어떤 「애매함」을 내포한 체험으로 변용되고 있다.
눈 앞에서 계속 움직이고 변화하는 남춘모의 작품. 거기에서 「색채」와 「선」이 내 쪽을 향해 다가온다. 그 때 항상 움직이고 변화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곳에 하나의 특이한 공간이 생겨나 있음이 느껴지고, 보인다. 회화작품이라면 어떤 것에든지 공간이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것은 평면 위에 한정된 공간이거나 혹은 관객 측의 「일루져니스틱」한, 내지는 「심적」인 공간을 말한다. 그러나 남춘모의 작품이 만들어내고 있는 것은 극히 실체적이면서도 입체적이지는 않은 공간인 것이다. 게다가 거기에는 안개 낀 듯한, 안개가 자욱한 듯한 분위기가 있다. 쾌청한 날의 하늘 같지는 않은 것이다.

3. 빛과 그늘
빛과 그늘」에 대한 것, 조명을 잊고 있었다.
어떤 작품이라도 빛이 없으면 눈에 보이지 않지만 남춘모의 경우에는 그런 것이 문제는 아니다. 두께는 얇아도 U형 고랑으로 이루어져 있는 화면은 빛이 닿아 있는 부분과 그림자 부분이 대단히 복잡하게 얽혀 있다. 햇빛을 차단한 화랑 내부에 전시하여 평범하게 조명을 설치한 것뿐이지만, 살아있는 관객은 움직이지 않을 수 없으므로 그에 수반하여 화면 위의 빛이 움직인다. 아니, 변화한다. 즉 작품 그 자체가 관객에 대해 움직이는 것이다. 우리들 관객은 이 「빛과 그늘의 유희」 속에 놓여 있는 그런 느낌이 든다. 주역은 남춘모도 우리들 관객도 아니며, 남춘모가 만든 「사물」로서의 작품조차 아니며, 바로 이 「빛과 그늘」인 건 아닐까? 그런 느낌마저 든다. 남춘모도 우리들 관객도 주역인 「빛과 그늘」에 안주하여 몸을 맡긴다. 남춘모의 시도는 이처럼 「빛과 그늘」을 불러들이는데 성공한 작품이 되었다.
그는 어중간하게 「형태」를 그리거나 하지 않고, 또한 어중간한 추상적 구성작품으로 만들지 않고, 「표현」을 일단 「자기」에서 분리시켜 출발했다고 말해도 되리라. 「근대미술」의 「자기표현」이 끝난 후에 무엇이 「표현」이 될 수 있는가? 그는 여기에 파고들어 시행착오를 거쳐 현재의 작품에 도달했다. 그의 작품이 어떤 종류의 「장치」로 보인다고 하면 이는 긍정적인 의미에서 올바르다. 「빛」을 컨트롤하고 싶되 서투른 「자기표현」을 시도하면 시종 「빛」에 휘둘릴 뿐인 작품밖에 나오지 않으리라. 어떤 의미에서는 「장치」에 철저해야 비로서 「빛」을 마음대로 불러들일 수 있게 된다. 실로 이 「빛과 그늘」에 의해서야 말로 「색채와 선」은 관객의 눈에 실체적인 대상으로 수용된다. 색과 선으로 빛과 그늘의 일루젼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빛과 그늘」이 「색채와 선」에 현실의 빛과 그늘을 부여한다. 이로 의해 「색채와 선」 자체가 실체적이 된다.
더욱이 거기에 생겨난 이 얼마나 풍부한, 음영으로 가득한 공간이란 말인가!
되풀이 말하지만 그것은 입체적인 확산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회화공간의 확산이다. 남춘모 자신이 「회화」로 제작하고 있다. 우리들 관객도 「회화」로 수용하고 있고 그 이외의 수용방식은 없다. 그의 작품을 「사물」로 보면 아주 약간의 두께가 있는데 실제로 작품으로 볼 때는 이 두께에 「빛과 그늘」이 흔들리고 있고 그 「흔들림」이 두께를 지우고 있다. 내지는 그 두께를 평평하게 만들고 있다. 아니 오히려 일종의 도톰한 평면으로 만들고 있다. 평면공간에 하나의 도톰함, 하나의 안개 낀 듯한 확산을 가져온다.
이런 회화는 달리 유례가 없다. 남춘모의 회화는 「본다」는 체험에 변경을 강요한다. 일반적인 회화는 움직이지 않으므로 「본다」는 것은 오직 관객 측의 사항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작품」 자체가 부단히 동요한다. 혹은 안정감 있게 흔들리기 때문에 관객 측의 「본다」도 동요하고 안정감 있게 계속 흔들린다. 무리하게 어딘가에서 그것을 멈추려 하면 사실은 동영상인데 임의의 장면에서 정지당한 것 같은 부자연스러움이 발행한다. 즉 어디에서 정지해도 부자연스러운 것이다. 남춘모의 회화를 스틸 사진으로 찍는 것은 엄밀히 말하면 불가능하다. 그의 작품 앞에서 오락가락한 내 체험을 떠올려보면 그것은 일목요연하지 않은가? 이런 작품은 달리 없다.
나는 「보고 있는」 것인가? 「보고 있는」 것이라면 무엇을 「보고 있는」 것인가? 그런 근원적인 물음이 필연적으로 떠오른다.

4. 색・선・빛
내가 보고 있는 것은 실제가 된 「색채와 선」이며, 그것이 평면공간을 빠져 나오는 확산 속으로 출현해 나옴으로써 생겨난 하나의 작품이다. 그리고 이 「작품」은 자신이 「회화」라고 주장한다. 어려운 건 「색채와 선」을 일루젼이 아닌 대상으로 실현하는 일인데, 남춘모의 방법을 알기 쉽게 설명하면 회화평면을 일단 물질화한 후에 다시금 비물질화하는 것이다. 천을 폴리에스테르로 굳히고 다시 U형으로 만들어 극히 미미한 두께를 부여하여 물질화한다. 이것은 캔버스 대신이 되는 남춘모의 독창적인 「지지체(support)」만들기라고 해도 좋으리라. 「특허」를 신청해도 좋을지도 모른다. 다만 단순한 「지지체」가 아니라 그 단계에서 이미 최초의 색채가 시공되어 있거나 한다.
그리고 다음으로 이 「지지체」 위에 「색채와 선」을 시공한다. 그리는 것이 아니라 「시공하는」 것은 물론 뭔가를 그리는 행위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단계에서 「일루져니즘」이 소멸한다. 회화가 일루져니즘과는 무관한 지평에서 성립한다는 뜻이다. 이것으로 남춘모의 제작작업은 끝인데 완성된 작품은 이미 비물질화되어 있다.
이런 사실이 명확해지는 건 물론 전시되었을 때이다. 조명 아래에 놓였을 때 「빛과 그늘」이, 그리고 관객의 「눈」이 「비물질화」를 증명한다. 관객은 약간의 두께를 가진 회화가 실현하고 있는 소위 「2.5차원」의 확산을 체험한다. 「색채와 선」과 「빛과 그늘」을 현실 공간으로까지 끄집어내서 만나게 함으로써 「2.5차원」의 확산, 풍부한 확산, 풍부한 애매함의 확산을 만들어낸 이 시도는 완전히 새로운 회화이며 동시에 본질적인 의미에서 회화이다. 왜냐하면 첫째로 일루져니즘에도 추상회화 수법에도 의존하지 않고 실현시킨 새로운 회화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둘째로 「색채・선・빛」이라고 하는, 회화를 회화답게 만드는 가장 본질적이고 근원적인 것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5. 물질과 정신
여기까지 써오면서 내 뇌리에 자연스레 떠오르는 것은 한국의 소위 「모노크롬파」 내지 「모더니즘파」라 불린 이미 역사적인 존재라 해도 과언이 아닌 하나의 회화양식 내지 회화사상이다. 남춘모의 회화와 「모노크롬파」회화 사이에서 나는 동질성(계속성)과 차이(새로움)을 느낀다.
동질성은 화면이 모노크롬적이라는 그 사실 자체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그런 류의 피상적인 견해는 틀렸다. 사견으로는 「모노크롬파」회화의 가장 큰 특징은 간단히 말해 「그 위에 회화가 그려지는 것(보통은 캔버스나 종이나 판자)」과 「지지체 위에 칠해지는 것(보통은 물감)」을 보통의 물질로 해방시킨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면 위에서 벗어나지 않고 새로운 회화를 창조한 것, 따라서 그 회화는 지지체와 안료 물질 그 자체로 이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극히 정신적인 대상이 된 점, 바꿔 말하면 「정신」보다 「마음」을 직접적으로 표현하게 된 점에 있다. (덧붙여 나는 이미 예전부터 한국작가를 논한 많은 작가론 속에서 이 사실을 계속 써왔다. )
그리고 이것이 가장 중요한데, 물질과 정신(마음)을 연결함에 있어 「감각」을 통해 실현한 점, 바꿔 말하면 「회화」를 이를 위한 예술로 변혁한 점. 이것이야말로 한국의 「모노크롬파」 회화가 이룩한 달성, 세계에 유례가 없는 독창적인 달성이다.
회화를 구성하는 지지체(캔버스, 종이 등)나 물감(유화 물감, 아크릴 물감, 수채화 물감 등)에 대해 재검토하여 그 서양적인 관점에서 자유로워졌을 때, 「모노크롬파」 화가들은 회화란 「물질」 위에, 그 표면 위에 뭔가를 그리는 것이 아니라 「뭔가를 실현하는」것임을 이해했다. 지지체나 안료로 무엇을 쓸까는 본질적인 사항이 아니다. 무엇을 쓰던 아무튼 우선 첫 번째로 자신의 「정신」 그 자체를, 「마음」 그 자체를 「실현」하지 않으면 더 이상 회화표현은 성립하지 않음을 직감적이긴 해도 깨달은 것이다, 「형태」있는 것을 그리는 방법을 사용해도 상관없지만 관객은 왕왕 「형태」만을 보아버리고 화가가 거기에 담은 「마음」은 보지 않기 때문에 화면은 「비・재현적」인 편이 바람직하다. 물론 「정신」이나 「마음」의 「알맹이」는 화가에 따라 달라진다. 그러나 구체물의 형태를 빌리지 않는 이상, 구체물에 꼭 들어맞지 않는 이상, 「정신」이나 「마음」의 직접적인 표현은 필연적으로 외견상 비슷해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것은 「양식」이 아니다. 그렇게 해서 「모노크롬파」의 회화군이 탄생했다.
물질에 정신이나 마음을 맡기는 것이다. 예를 들면 서양의 미니멀리즘 회화의 대부분은 물질만으로 일원화하는 결과에 그쳤다. 그로부터 반세기 가까이 지난 지금 그 중에 더 이상 볼만한 것들은 거의 없다. 한편 한국의 「모노크롬파」회화가 아직 전혀 퇴색하지 않은 것은 물질이 정신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면, 물질이되 물질이 물질성을 잃지 않은 채 거기에 「정신」 내지는 「마음」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깃들어 있다」고 하기보다 물질이 동시에 정신(마음)이라는 「작품」이 탄생한 것이다. 물질은 정신(마음) 그 자체일 수도 있다. 즉 정신(마음)은 물질에도 스스로를 맡길 수 있다.
여기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감각」이다. 「모노크롬파」회화의 달성은 오직 「감각」만에 의해 이루어졌다. 거꾸로 말하면 오로지 그런 「회화」를 실현하기 위해서만 소위 「감각」을 철저하게 쥐어짜고, 확산되는 「감각」을 여기에 수렴시켰다. 「모노크롬파」에 있어 회화는 「감각」의 응축체가 되었다. 「감각」이 하나의 목적을 향해 응축되어 있다. 그런 존재로서 「모노크롬파」회화를 새롭게 재조망해야 한다.

6. 감각의 확산
남춘모의 회화는 본인의 자각이야 어쨌건, 이 달성을 계승하고 있다. 관객들이여, 다시 한번 그의 작품 앞에 서서 잘 보기 바란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즉 「감각」을 통해 관객 자신의 정신(마음)과 마주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터이다. 동양 현대회화와 서양 현대회화의 감상의 차이는, 전자는 그림 앞에 서면 시작도 끝도 아무튼 「허심탄회」해지지 않으면 본질이 보이지 않는 데에 있다고 말하면 되리라. 즉 전자는 관객을 「허심탄회」하게 만들어서 새로운 회화의 지평으로 데려간다. 「허심탄회」란 「마음을 넓고 고요하게 비운다」는 뜻인데 여기서는 「감각」을 자유롭게 움직이기 위해서임에 다름 아니다. 그렇게 이끌려 가기 싫은 서양파 관객도 있겠지만 어쩔 수 없다.
남춘모의 회화로 말하자면, 그 U형의 나열만을 보면 확실히 물질인데 「모노크롬파」와는 달리 그다지 물질적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는 것은 「빛과 그늘」을 빌려서 거기에 「공간」을 불러들였기 때문이다. 그 점이 다르다. 「물질」 속에 「정신(마음)」을 실현한다는 점에서는 같으나 남춘모 쪽은 「평면」에 확산이 있고 「빛과 그늘」이 있다. 전부를 이차원 평면 위에 가두어 두지 않고 「0.5차원」분을 「빛과 그늘」을 이용해 만들어내었다. 이 「빛과 그늘」이 관객의 「감각」의 존재 방식을 바꾼다. 「감각」은 보다 자유로워지면서 그럼에도 「0.5차원」분만큼의 확산을 향해 집중하는 것이다.
여기에 남춘모의 새로움이 있다. 예전의 「모노크롬파」 회화에서의 「감각」이 일점一点집중형이었다고 한다면 남춘모의 「감각」은 하나의 「확산」을 향해 집중한다. 전자는 「물질=정신」이라는 목표만을 향해 「감각」을 집중시켰다. 그에 반해 후자는 「감각」의 폭이 넓어졌다. 「회화」를 향하고 있음은 마찬가지이고 목표도 여전히 「물질의 정신(마음)화= 정신(마음)의 물질화」에 있다. 그러나 「2.5차원」의 창출이 「감각」의 「움직임」을 바꾼 것이다. 그에 따라 회화 자체에 소위 「볼록함」이 생겨났다.

7. 향기
1970~80년대 「모노크롬파」에게 있어서는 「평면 위」란 것이 거의 절대조건이었음에 반해, 1961년생인 남춘모는 「회화」 자체를 그 「형식」마저 포함하여 근본적으로 재창조해야만 했다. 즉 「평면」이라는 기본조건마저 제쳐놓는 것으로 「회화」를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그는 회화를 「색채」와 「선」까지 해체하는 작업부터 시작했다. 단, 해체할 뿐이라면 어떤 의미에서는 간단했고, 미니멀리즘 내지 개념예술의 방법은 이미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그가 그 방식을 채용하지 않았음은 명확하며, 또한 그것은 올바른 선택이었다. 서양의 1960~70년대적인 미니멀리즘이나 개념예술로는 더 이상 미래가 없음이 늦어도 1990년대 말, 즉 20세기 중반에는 명확해졌기 때문이다.
글로벌한 견해로 본다면 20세기 말기 미술의 「극한화」나 「쇠퇴」나 「복고」나 「반복」의 상황 속에서 남춘모는 그것들과는 다른 방향을 바라보았다고 할 수 있다. 「미술」이란 무엇인가? 무엇이 「미술」인가? 그는 새로이 「감각」으로 돌아간다. 미술이란 본래 「감각」의 영역이라는 사실에서부터 새롭게 시작한다. 「정신(마음)」을 어떻게 「감각」을 통해 표현할까, 하는 것이다. 그는 그러한 원점으로 돌아간 시점부터 시작했다고 해도 좋다.
예전에 남춘모는 자신이 그려내고 싶은 것은 「내 마음 속에 느끼고 있는(smell) 어떤 정묘한 향, 희미한 향기(a subtle aroma)」라고 쓴 적이 있다. 아름다운 표현이다. 「감각」이라는 원점으로 되돌아갔을 때 그가 새로이 표현하고 싶다고 느낀 것은, 「마음 속에 그 내음을 느끼고 있다, 정묘한 향, 희미한 향기」였다. 그는 그것을 다름 아닌 「회화」로 표현하고 싶었다. 여기서는 우연히 「후각」에 빗대어서 썼을 뿐이라는 그런 것이 아니다. 그런 식으로 이해한다면 그의 이 아름다운 표현이 무의미해진다. 근원을 파헤치면 그는 정말로 어떤 향을 느끼고 있었고, 그 향이 내뿜는 향기를 회화로 표현하고 싶었던 건지도 모른다. 아무튼 그런 의지가 있었기에 그의 새로운 「회화」가 탄생했다. 「회화의 감각」이 「냄새」까지 둘러싼 것이다.
냄새」은 눈을 감아도 느낄 수 있지만, 눈을 뜨고 있지 않으면 느낄 수 없는 「냄새」도 있을 수 있다. 눈을 감고 있는 사람에게는 냄새의 근원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그 사람은 소위 너무나도 순수화된 냄새밖에 느끼지 않는다. 그것은 진정한 향의 체험이 아니라고 남춘모는 생각한다. 냄새 또한 「세계」가 있어야만 비로소 성립한다. 「세계」 전체를 수용하고 있다는 전제 위에서 냄새를 느낀다. 「소리」도 「감각」도 마찬가지이다. 사람 눈에 「세계」가 보인다. 하나의 냄새가 흘러오면, 어떤 소리가 들려오면, 사람은 자연의 냄새의 근원을 보려 하고 소리의 근원을 보려 한다. 눈으로 냄새나 소리를 특정 짓고 확인하려 한다. 이처럼 「세계」 전체의 수용이란 「감각」에 의해 확인되며 「본다」는 행위가 냄새나 소리를 특정 짓는 것이다.
더욱이 이 「시각」의 움직임은 확인이나 특정을 가져올 뿐만 아니라 「시각」스스로 속에 냄새・소리・사물의 감촉도 기억하는 듯하다. 「시각」이 확산되는 것이다.
깊이 파헤치면 남춘모는 정말로 어떤 향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건 아무래도 상관없다. 자신이 진정 표현하고자 하는 것을 향의 비유로밖에 표현하지 못한다면, 작가 내부에서 이미 냄새가 시각으로 기억되어 있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시각화」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냄새도 소리도 사물의 감촉도 시각화가 가능하다는 사실에 다름 아니다. 눈으로 냄새 그 자체를 맡는 일, 소리 그 자체를 듣는 일, 사물의 표면 그 자체를 만지는 일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오감 전체를 「감각」이라 부른다 할 때, 거기에는 아무래도 「시각>후각」, 「시각>청각」,「시각>촉각」이라는 관계가 존재하고 있는 듯이 여겨진다. 이것이 냄새・소리・촉감의 「시각」에 의한 기억을 가능하게 한다.
물론 오감이 가져오는 정보는 뇌에 의해 종합적으로 「인식」된다. 최종적으로는 뇌가 판단한다. 그러나 남춘모라는 화가가, 자신이 그려내고 싶은 것은 「내가 마음 속에 느끼고 있는 (smell) 어떤 정묘한 향, 희미한 향기(a subtle aroma)」라고 말할 때, 「시각」에 의해 살아있는 그의 뇌는 「시각」적 판단을 최우선시한다. 그리고 사람은 누구라도 특별히 예술가가 아니라도 뭔가를 최우선시해서 살아있는 존재이다. 여기에 인간이 인간인 하나의 근거가 있다. 예술가의 경우, 그 사실이 또렷하게 전면에 드러나는데 지나지 않을 뿐이다.

치바 시게오



Nam Tchun Mo - An Exquisite Aroma in the Heart

1. Pictures are Always Moving
I stand in front of pictures in order to see them. That is my job, so I have no idea how many times I have done this. Unlike an artist, I simply stand and look. As a critic, in many cases, I have to put this into words, which is not easy. However, when I look at them, I definitely try to look at them subjectively without thinking about what I will write later. In other words, I try my very best to look with my senses only, without words intervening. Or at least ideally.
Normally, in a realistic picture (one reproducing reality), something is depicted there, so what first catches my eye is that “something.” For an abstract picture (a non-figurative one), my eye first heads towards the colors, lines and composition. In either case, pictures are flat, so I stand in the center of the work. When I stood in front of NAM Chun-Mo’s work, I stood in the center as normal, but it felt very uncomfortable. His works have this minute “thickness” to them. While not as thick as a relief or something three dimensional, there is a thickness created from the grooves.
He impregnates cloth with polyester, and then, when it’s dry, he bends the stiff cloth into U-shapes. These U-shapes, these grooves, when lined up, form the “surface” of his works. Thus when I stand directly in front of these grooves of these U-shapes, facing them perpendicularly, I see the ridge lines as lines. And at the same time, towards each edge (left and right, top and bottom), as they are on angles, I see the U-shapes as well. I see it as something that is a plane, but not a plane; as not a plane, but a plane.
And then there are the colors. The U-shapes themselves have colors. These are not the so-called “earth colors” of whites or browns, but blues and reds and blacks. With whites and browns, lines may be drawn down the middle of the grooves. Sometimes only the flanks of the U-shapes are blue or red, or sometimes only the bottom is black. The changes in how these colors are used make his works extremely varicolored, and offer ever-changing ways to see them. This effect is a bit hard to explain in words without standing in front of one of his actual works. While they are flat, there is an extension of space with a little thickness above that flat surface. But you couldn’t say that they aren’t flat, as the works are clearly flat plane works. That is, what he is attempting is clearly pictures.

2. Actualizing “Colors and Lines”
I stand in front of NAM Chun-Mo’s work. At that moment, what happens to me, a viewer? I experience colors and lines materializing.
To look at a picture is, normally, to see an illusion, and the colors and lines are merely elements making up that illusion. Even in abstract art, the colors and lines are important elements making up the overall composition, but (while depending on the composition) in the end they converge at the level of illusion. In other words, color and line both start and end with illusion. However, NAM Chun-Mo’s work is different. There are no specific shapes, and no abstract art-style compositions. This is because his pictures do not stop moving. I wouldn’t think I need to add this, but this is quite different from the old “kinetic art.” Kinetic art is designed to move the work itself, or give viewers the impression it is moving, and was art designed, from the first to the last, to be illusionistic.
You will be able to tell if you stand in front of one of NAM Chun-Mo’s works, but his pictures only start moving as works once they hold the viewer’s gaze. Without any viewers, these pictures are sleeping. The viewer’s experience turns the work into a picture. Moreover, each time the viewer moves his line of sight, each time he moves his body, or in other words, every moment, the picture changes. These are very rare picture that lack a predetermined form. In other words, the “pictures” contain a degree of “ambiguity.” This is what the artist is deliberately aiming for. The viewer who stands in front of one, looking at from the front, then the sides, then the front again, is only then able to grasp the entirety. The viewer’s body and eyes inevitably pass in front of his work like filming a movie. This object, like a moving image, thus grasped, is his “work,” his “picture.” Of course, the second time you see it, you will see a different moving image to your first time. Therefore, moving images like these can only be experienced in situ by their nature, and are only created by being in front of the actual works. This “ambiguity” is interesting.
The shapes of NAM Chun-Mo’s works themselves do not change. What changes is, if we leave the lighting out of it, the positions the viewers stand in, and thus the way their eyes receive this. This does not mean we can say that it is the viewer who creates Nam’s work. His colors and lines borrow the viewer's vision. Colors and lines borrow the viewer’s vision and change into a single tangible entity that is not an illusion. At the same time, while the viewer imagines themselves to be seeing an illusion, in fact it is their own visual experience that is changing. The experience of “seeing” changes into an experience close to touching something solid, tangible. It changes from “seeing” into “seeing as if you are touching.” To put it another way, “seeing” goes beyond its normal scope and changes into an experience containing a certain ambiguity.
NAM Chun-Mo’s works continue to move before my eyes, in ever-changing ways. From them, colors and lines come towards me. At that moment, despite the fact that they are always moving, always changing, I can sense that a single unique space has been created, and am able to see it. This does not mean that any picture has a space to it. Those are just spaces limited to the surface, or an illusionistic, psychological space on the viewer’s part. However, what NAM Chun-Mo’s works generate is an extremely tangible space that is not actually solid. And there is an ambience that appears to have a haze over it, a mist hanging before it. It is not like the sky on a fine day.

3. Light and Shade
I forgot about lighting: “light and shade.”
No work can be seen without light, but with NAM Chun-Mo’s work, that's not the issue. The surface, with its lines of U-shaped grooves that while not deep, is an extremely complex assembly of areas where the light hits and areas in the shade. Even when displaying it lit normally in the inner areas of galleries, with no sunlight reaching it, the viewers, who as living beings are not of course still, see the light move on the surface. No, not move: change. In other words, the work itself moves relative to the viewers. We the viewers feel as if we are being placed in a “play of light and shade.” The star is not NAM Chun-Mo or the viewers, it would not even be a “thing” he has created; it is this “light and shade.” I have a kind of feel a bit this way. Both NAM Chun-Mo and we the viewers are held in the arms of this “light and shade,” which is the real star. NAM Chun-Mo’s experiment here is a work that has thus succeeded in calling forth “light and shade.”
NAM does not create “forms” or abstract compositions by half measures: we could say that his work starts from separating “self” from “expression.” After the “self-expression” of modern art ended, what can become the “expression”? NAM has seized on that idea, and, through trial and error, ended up with the work we have today. If his works are seen as a type of “device,” then that would be correct in the positive sense. If he were to try and control “light,” then if he envisaged a clumsy self-expression, he would only be able to create works that begin and end with being a fool of by “light.” In a sense, it is by emphasizing this “device” aspect that he has first been able to call forth “light” in the sense he wishes. It is the “colors and lines” that are actually created by this “light and shade” that catch the viewers’ eyes as something tangible. Rather than drawing an illusion of light and shade with color and line, “light and shade” give actual light and shade to “color and line.” This allows the “color and form” itself to become tangible.
And what is born there is this space filled with this rich shadowing!
I am repeating myself, but this is not a solid expansion, or spreading out. It is only a spreading out within the space of the picture. NAM Chun-Mo himself creates them as “pictures.” We the viewers see them as pictures, and there is no other way to see them than as that. If we see his works as “things,” then there is a small amount of thickness, but when we actually see the works, within that thickness “light and shade” are wavering, flickering, and this wavering removes that thickness. Or, flattens that thickness. Or rather, makes it a plane with a certain type of swelling to it. It creates a spreading out like a single mist covering it, a single swelling in a flat space.
There is nothing else like these pictures. NAM Chun-Mo’s pictures force a change on the experience of seeing. Most pictures do not move, so seeing is simply something that happens on the viewer’s side. However, here the work itself wavers, flickers constantly. Or it trembles comfortably, so the viewers’ own act of seeing wavers, and continues to tremble comfortably. If you try and force it to stop somewhere, then an unnaturalness that it has been stopped at some chosen point despise it being a moving image in reality. In other words, it is unnatural no matter where it is stopped. Strictly speaking, it is not possible to photograph NAM Chun-Mo’s pictures. If we recall our experiences moving back and forth in front of his works, that should be obvious. There are no other works like this.
Am I “seeing”? If I am “seeing,” then what am I “seeing”? That sort of fundamental question inevitably arises.

4. Color / Line / Light
What I am looking at is a work that is “colors and lines” given solid form, formed from its appearances in the expansion spreading out from the flat space. And this “work” itself is claiming that it is a “picture.” The tricky part is that the “colors and lines” are manifesting as something that is not an illusion, but to explain NAM Chun-Mo’s methods in a way that is easy to understand, the picture surface is initially materialized and then non-materialized. Cloth is hardened with polyester, and formed into U-shapes, materializing it by giving it the tiniest bit of thickness. We might say that this is the creation of the “support,” through NAM Chun-Mo’s creativity, that takes the place of the canvas. He might even be able to apply for a patent. However, that is not a simple “support,” but even at this stage already has the first colors applied to it.
Next, colors and lines are applied to this support. They are applied, rather than drawn, as of course nothing is actually being drawn. Therefore, the “illusionism” vanishes at this stage. The painting is formed on a flat ground unconnected with illusionism. This is the end of NAM Chun-Mo’s creative work, but the completed work is already made non-material.
What makes this clear is when it is exhibited. When placed under a light, the “light and shade,” and the viewers’ eyes, demonstrate this “non-materialization.” The viewers experience a spreading out from this picture, with its minute thickness – a sort of “2.5 dimensions” of spreading out. This attempt at creating a rich and vague spreading, a 2.5-D spreading, by drawing out “colors and lines” and “light and shade” into actual space and having them meet is a complete new picture, and at the same time, a picture in the truest sense of the word. This is because, first of all, it is a new picture that achieves illusionism without relying on the methods of abstract paintings, and secondly, because it is formed from the most basic elements that make a painting a painting: color, line and light.

5. Material and Spirit
Writing this far, something that has floated naturally to the back of my mind is the idea of painting, the format of painting, that has been called Korea’s “Monochrome School” or “modernism school” and could already be in the history. I sense both similarities (continuance) and differences (newness) between NAM Chun-Mo’s paintings and the Monochrome School paintings.
The similarities are not due to the fact that the surfaces are monochromatic. That sort of superficial way of looking is mistaken. My own opinion is that the most important feature of the Monochrome School paintings is, put simply, the creation of a new painting without departing from the surface, regardless of the release to normal materials of “ones where the painting is drawn on top (normally canvas, paper, or board)” and “something (normally paints) that is painted onto a support”, and that painting is therefore, despite being formed from the very materials of supports and pigments, extremely spiritual, or in other words, they express the “spirit” or the “heart” directly. (Incidentally, in many of my critical essays on Korean artists, I have been writing about this for a long time.)
Then the most important part is the achievement of using “senses” to link material and spirit (heart), or in other words, the transformation of the “picture” to art for that purpose. This is achieved by the Korean Monochrome School pictures, and is a unique achievement without peer in the world.
When they reconsidered the support composing the picture (the canvas, paper, etc.) and the paints (oils, acrylics, watercolors, etc.) and freed themselves from those Western viewpoints, the Monochrome School artists understood that a painting was not what you drew on the surface of the material, but what you expressed. What you use for the support or the pigments is not what really matters. The Monochrome School artists figured out, even though intuitively, that whatever you use, if you do not “bring about” your own “spirit” itself, your “heart” itself at all, then the artistic expression will not come about. It’s okay to use the method of drawing something with a “form,” but viewers will not infrequently just see this “form,” and not see the “heart” that the artist has incorporated in there, so the surface should be something that is “non-reproducible.” Of course, the “contents” of the “spirit” and “heart” are different with each artist. However, as long as no specific forms are borrowed and it does not follow anything specifically, the direct expressions of “spirit” and “heart” are, inevitably, similar in terms of external appearances. However, this is not a “style.” This is how the Monochrome School painting group was formed.
Entrust spirit and heart to materials. For example, almost all the minimalist paintings in the West ended up centralizing on materials alone. Now, half a century later, there is almost nothing to see in them. On the other hand, the reason why the paintings of the Korean Monochrome School have still not faded at all is because the materials are spiritualized. To be accurate, it is because while they are materials and the materials do not lose their materiality, there is a “spirit” or “heart” residing in there. Or, rather than “residing,” a “work” is created where the material is at the same time the spirit (heart). The material can be the spirit (heart) itself. In other words, the spirit (heart) can entrust itself to the material as well.
The decisive role here is played by “senses.” The achievements of Monochrome School paintings have been brought about solely by the “senses” alone. Conversely, the “senses” are thoroughly imbued only to realize the “painting.” The scattered “senses” are converged towards that alone. The paintings in the Monochrome School are the condensate of the “senses.” The “senses” are condensed towards one target. In that sense, we must review the paintings of the Monochrome School once more.

6. The Spreading of the Senses
NAM Chun-Mo’s paintings inherit this achievement, regardless of whether he was aware of it. Viewers, go and stand in front of his works again. Before you know it, you will find yourself facing your own spirit (heart) through your “senses.” The difference in viewing Eastern modern art and Western modern art could be said to be that if you stand in front of a painting from the former, if you don’t see it “without preconceived notions” then the essence will not be seen. In other words, the former brings viewers to the plane of a new painting by making them “without preconceived notions.” Here, “without preconceived notions” means “expand and calm your heart, and make it empty.” However, here that is simply letting your “senses” work freely. There may be some Western-school viewers who do not wish to be taken along that way, but too bad.
In NAM Chun-Mo’s paintings, if we only look at the rows of these U-shapes then they are certainly material, but the reason that, unlike the Monochrome School, they do not feel all that material is because they borrow “light and shade” and call forth “space” there. That is the difference. Expressing “spirit (heart)” in the “material” is the same, but his work has a “planar” spread, and “light and shade.” Without closing everything up into a two-dimensional surface, the “0.5-D” part is created with “light and shade.” This “light and shade” changes the way the viewer’s “senses” are. The “senses” are both free, and at the same time, concentrated towards that “0.5-D” spread.
This is where NAM Chun-Mo’s newness lies. If the “senses” in the old Monochrome School paintings were focused on a single point, then for NAM Chun-Mo, the “senses” are focused on a single “spreading.” With the former, “senses” are concentrated only towards the target of “material = spirit.” In contrast, with the latter, the breadth of the “senses” is spreading out. Their facing the “picture” is the same, and the target remains the same, “the spiritualization (heart-ification) of the material = the materialization of the spirit (heart).” However, the creation of the “2.5-D” changed the “action” of the “senses.” Thanks to this, what we call the “swelling” is created on the picture itself.

7. Aroma
To the Monochrome School in the 1970s and 1980s, “on the plane” was an almost absolute condition, while for NAM Chun-Mo, born in 1961, the “picture” itself, including the “form” itself, had to be fundamentally made new. In other words, from the removal from the basic condition of the “plane,” the “picture” had to be started. He started from taking apart pictures down to “colors” and “lines.” However, if all he did was take them apart, it would have been easy because minimalism or conceptual art methods were already known. However it is clear that he did not use that method, and that was the right choice. In the minimalism and conceptual art of the West during the 1960s and 1970s, the fact that there was nothing lying ahead became clear by its end, in the 1990s at the latest, or in other words during the 20th century.
From a global point of view, NAM Chun-Mo was able to aim for a different direction to all the “extremism,” “vanishing,” “throwbacks,” and “repetitions” of art at the end of the 20th century. What is “art”? What can be “art”? He returned to the “senses” again. Starting again from the fact that art is originally a matter of “senses.” The issue is, how to express the “spirit (heart)” through the “senses.” We may say that he started by going back to this starting point.
NAM Chun-Mo once wrote that “I always want to portray a subtle aroma that I can smell inside my mind.” This is a beautiful way to put it. When he returned to the starting point of the “senses,” what he felt he wanted to express again was the “subtle aroma, the delicate perfume that I can smell inside my mind.” He wanted to express that in unique “pictures.” I have not used the “sense of smell” here as a metaphor. If that’s how you understand it, then his beautiful words are meaningless. If we trace it back, perhaps he thought that he really smells something, and the aroma of that smell is what he wants to express in his pictures. At any rate, it is that intent that has given birth to his new “pictures.” The “pictures’ senses” incorporate even “smell.”
“Smell” can be sensed even when your eyes are shut, but there could be “smells” you cannot detect unless your eyes are open. As people with their eyes shut cannot tell where the smell is coming from, those people are only able to sense the most simple, pure smells. NAM Chun-Mo does not believe that this is the real experience of smell. Smells are also first created once there is a “world.” Once we have the prerequisite of accepting the entirety of the “world,” then we can sense the smells. “Sound” and “touch” are the same. The “world” is seen in peoples’ eyes. And if a smell is wafting around there, if a sound is heard, then people will naturally try and see where that smell is coming from, where that sound is coming from. We try to specify and confirm smells and sounds with our eyes. In this way, the acceptance of the overall “world” is confirmation through our “vision,” and “seeing” specifies smells and sounds.
In addition, the action of “vision” is not just about specifying and confirming. We also remember smells, sounds, and touches within the “vision” itself. “Vision” expands.
If we trace it back, NAM Chun-Mo may not perhaps have sensed a real smell. However, that’s beside the point. If he is only able to express what he is trying to say through the allegory of aroma, that is because inside him the smells have already been remembered as vision. They have been “visualized.” This means nothing less than that smells and sounds and touches can be visualized. You cannot smell a scent, hear a sound, or feel the touch of a surface with your eyes. However, by calling the total of our five senses, “senses,” we can imagine a relationship like “vision > smell,” “vision > hearing,” and “vision > touch.” This is what allows us to remember the “vision” of smell, sounds, and the touch of objects.
Naturally, we become comprehensively “aware” of the information brought to us by our five senses through our brains. In the end, the brain makes the judgment. However, when the artist NAM Chun-Mo says what he wants to depict is the “subtle aroma that I can smell inside my mind,” his brain, which is living off “vision,” gives the top priority to “visual” judgments. And anyone, whether an artist or not, lives by prioritizing something. That is one of the proofs that humans are human. For an artist, all that happens is that that aspect comes out to the surface clearly.

Shigeo CHIB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