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아(優雅)한 회화

STEPHANE BORDARIER

2011-03-01 - 2011-03-31

Stephane Bordarier - 우아/優雅/한 회화

독학의 수련기를 거쳐 화가 스테판 보르다리에Stephane Bordarier가 처음 걸음한 곳은 파리의 장 푸르니에Jean Fournier화랑이었다. 그를 붙들어야한다고 조안 미첼Joan Mitchell이 장 푸르니에에게 권유하면서 보르다리에는 그 곳 공모의 장소에 막내 격으로 가담한다. 회화의 우정으로 맺어진 공모의 장소에는 이미 샘 프란시스Sam Francis, 제임스 비숍James Bishop, 한타이Hantai 그리고 그의 오랜 고향 선배 끌로드 비알라Claude Viallat의 색이 우아elegance로 미소하고 있었다.
우리가 여기서 말하는 우아는 나른한 세련의 감미로움과는 다르다. 프랑스 철학자 조르쥬 바따이유George Bataille는 우아를 웅변eloquence의 반대쪽에 위치시켰다. 화폭은 화가의 안이한 밀애의 장소가 아닌 만큼이나 자신을 손쉽게 우겨넣을 수 있는 웅변의 자리도 아니다. 화가의 어떤 이야기, 어떤 일화도 낯설고 쉰 목소리가 되어 지워지는 화폭이라는 그 불가항력의 거리 가운데 회화의 우정은 아슬아슬 둥지를 튼다. 그 우정의 먼 표정을 우아라 이름해 보자. 화가의 작품을 앞에 두고 “낯설어도 존경의 마음으로 다가설 수밖에 없다”던 장 푸르니에의 솔직함에서 우리는 그의 공모의 장소에 깃든 우아의 반영을 만난다.
화가 보르다리에 역시 낯설어하며 존경의 마음으로 다가갔던 것은 먼저 트레첸토 꽈트로첸토의 이탈리아 프레스코 그림들이었다. 그런데 그가 경건하게 다가가 놀라움으로 만난 것은 이를테면 성모자의 종교적 일화가 아닌 바로 회화였다. 거기서 그가 지켜본 것은 성모자라는 이름을 물리치고 그 형상을 지우면서 드러나는 회화의 표정이었다. 우리가 수백의 성모자상을 되풀이해서 바라볼 수 있는 것은 그 모두가 색으로, 색의 결로 드러나는 나름의 순수한 회화의 표정을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르다리에의 경건한 마음은 일화를 지우며 회화의 단순성에 몰두하는 금욕적 질문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금욕을 말하면서 그에게서 곧장 그린버그류의 형식주의와 같은 방법론적 기조의 과시를 찾지는 말아야겠다. 그의 회화의 단순성에 관한 질문은 평면성을 강령으로 하는 형식주의와는 다르고, 아울러 모노크롬의 형이상학적 부담으로부터도 벗어나있다. 그는 화면 전체를 정신의 색으로 뒤덮지 않았고, 이른바 평면이라는 회화의 순수성에 대한 강박관념도 없었다. 이처럼 단순한 정신의 투영이기를 거절한 그의 탐구는 그렇다고 신체 행위의 직접적 투사일 수도 없었다. 그렇다면 그가 회화에서 바라는 것은 무엇일까? 그가 말하는 “회화 특유의 색과 화면의 질”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어쩌면 우리는 정신과 행위의 구분에 지나치게 매달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화가 보르다리에의 회화의 단순성에 대한 관심이 과거 이탈리아 회화에 닿아있다 하더라도 당시의 회화의 순수성에 대한 염려와 무관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정신이 안이한 초월로 나아가고 행위가 무모한 시위로 빠져들 때 회화는 웅변이 되고 만다는 것을 그는 경계했던 것일까? 그의 시선은 정신과 행위의 구분이 묘연해지는 색으로 물든 화면의 결을 바라보고 있다. 여기서 화가는 자신이 눈여겨보았던 세잔이 말하는 ‘색으로 물든 감각의 논리’를 수학하고 있는 듯도 하다. 그런데 그의 감각의 논리는 억제와 단순화의 과정을 따르고 있다.
그는 자신의 작업을 이를테면 화폭에 색을 칠한다는 하는 단순한 움직임으로 제한하려고 한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그의 작업 과정은 부족한 것을 채워가는 충족과 성장의 과정이 아니라 남는 것을 버려가는 축소와 삭감의 과정이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매번의 그의 작업은 불필요한 과잉의 부분을 줄이고 지워가는 과정이다. 이러한 축소의 과정은 기법의 문제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너무 많이 보고 너무 많이 배운 것을 지우고 잊어가는 감각의 학습 과정이기도 하다. 색을 칠하는 간단의 움직임, 수많은 나의 기억이 가난해질 때 감각은 비로소 색으로 물들기 시작한다.
색을 칠하는 것, 우선의 색의 펼침은 형태가 된다. 하지만 형태는 미리 의도한 것이 아니었기에 어떤 형상으로도 자라지 못하는 무심하고 무표정한 형태로 남는다. 정신의 개입은 억제되고 최소의 몸짓마저 아스라하여 화가에 관해 아무것도 알려주지 못하는 익명의 형태, 보여 진다는 그 사실을 제외하고는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는 형태, 구성과 배치와 같은 어떠한 조형적 고려도 없는 허술하고 멍청하기까지 한 형태, 그렇게 태연히 되풀이되는 허심탄회한 형태, 6년간의 지리한 동어반복이 마침내 우리의 서투름과 빼어남에 대한 구분마저 무색하게 하는 어눌하면서도 순진무구한 갈색violet de mars의 형태.
기왕에 어떤 맵시나 자태에 구애받지 않던 욕심 없는 형태는 원래가 색을 칠하는 간단의 움직임과 다르지 않았다. 완고함을 모르기에 그 펼침을 허물없이 늘여가면서 형태는 기꺼이 색에 몸을 내어준다. 이렇게 그에게 색과 형태는 기탄없는 대위법으로 울리고 있다. 이러한 펼침과 울림이 색을 칠한다는 그 간단의 움직임의 결이다. 하지만 그에게 허물없는 펼침과 기탄없는 울림이 차마 안온한 색의 송가일 수만은 없었다.
가령 그의 화폭의 여백은 남겨둔 자리가 아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그의 작업은 불필요하게 남는 잉여의 것들을 지워가는 과정이다. 따라서 그에게 여백은 결코 한가한 정신적 심리적 여유의 장소가 될 수 없다. 여백은 이를테면 또 다른 색의 펼침이다. 그의 화폭의 긴장은 여기서 온다. 여백은 남겨진 부분이 아니라 화가로서는 펼침과 울림의 한계를 마주하며 어쩔 수 없이 물러서야 할 그 순간에 대한 최고(催告)라 할 수 있다. 방심과 긴장. 실제로 그의 작업은 의외의 속도 속에서 이루어지기도 한다. 프레스코화처럼 안료에 접착제를 섞은 탓에 건조의 순간은 화가를 냉정하게 화폭으로부터 몰아낸다. 색의 펼침과 울림은 이렇게 집중과 증발, 몰입과 퇴각의 움직임을 함께 담고 있다. 이것이 우리가 말한 색을 칠하는 간단의 움직임의 숨은 사연이다. 화가가 물러설 때 이윽고 색은 말한다. 그리고 색은 다른 색들과 각각의 어려운 긴장의 순간들을 잊고 고요히 말없는 우정의 담소를 나눈다. 그 때의 색이란 과연 무엇일까?
화가가 형태의 구성과 배치에 무심하였다면 그의 색 또한 선택에 의한 것은 아니었다. 그만큼 그는 어떤 색의 효과를 염두에 두지 않는다. 화가 보르다리에는 색에 대한 마티스의 무사(無私)의 감정을 기억하고 있다. 작품 ‘붉은 화실’을 두고 누군가가 마티스에게 물었다, 왜 붉은색이냐고. 마티스는 대답한다. “붉은색이 어디서 온 것이냐고, 그건 난 모른다”. 그렇다, 화폭에서 중요한 것은 색의 유래, 색의 의미가 아니라 화가가 모르고 있는 것, 바로 색 그 자체이다. 아무런 심리적 우회를 거치지 않고 순진무구하게 대면하게 되는 색. 보르다리에의 색은 풀을 곱게 발라 벽에 붙인 듯 거기 그렇게 말없이 고요히 서있는 색이다. 나는 말없이 서있는 화가의 색을 무심으로 바라보았을 장 푸르니에를 잠시 기억해본다.
2005년 10월 파리의 FIAC에서 난 그를 마지막 만났다. 회화의 우정이란 이름으로 오랜 시간 그와 함께 하였던 오랜 공모자들을 주위의 벽에 걸고서 그는 그 가운데 서있었다. 그는 뷔퐁Buffon이 남긴 색에 관한 이야기를 그리고 보르다리에가 특히 좋아하였던 비숍의 이야기를 나지막한 위엄으로 나에게 건네었다. 커다란 고통을 숨기며 다가올 임종에 아랑곳하지 않던 그는 한없이 고요하고 단아하였다. 나는 그가 한 말들은 잊었다. 하지만 나에게 그때의 그는 그의 벗들과 나란히 벽을 뒤로한 하나의 우아한 색으로 남아있다.

이달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