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제의 무제

KIM KYUNG AE

2015-11-20 - 2015-12-05

김 경애씨의 미술 전시를 중심으로 전개한 넓은 의미의 예술의 소개

홍 가이 (수학물리학과 철학을 전공하여 통합학문연구로 MIT에서 박사학위를 받은후, 미국과 유롭 그리고 한국의 여러 유수대학에서 교편을 잡은 씨는 80년대에는 해외에 거주하면서도 한국의 공간잡지의 Contributing Editor (기고하는 편집인)으로 현대미술, 음악 그리고 문학에 대한 글을 썼었다. 그가 최근에 쓴 글들 중에는 “멀티미디어와 신레네상스”란 월간미술에 기고한 글이 있다. 원래는 San Francisco Art Institute에서 1995년2월 씨가 행한 공개강의를 한국어로 번역하여 월간미술에서 출판한 것이다. 가장 최근에는 서울에 새로 생기는 “바이달/쥬신 문화콘텐츠 연구소”의 상임연구원으로 임명되어, 동북아시아의 최고대역사와 사상을 연구하여 세계화시키는 작업을 하고 있다. 그는 80년대 후반부엔 영국켐브릿지대학에서는 희곡작가로 이름을 날리기도 했는 데, 서울의 저명한 회사들과 작품을 몇 개 진행 중이라고 한다. )

1) Introductory Preamble
Joseph Brodsky (1987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시인) 은 반체제 “불량인”으로 낙인 찍혀 감옥을 전전하다가 1972년 러시아(당시엔 소비엣 유니온)에서 추방당하였다. 서방세계로 넘어와 미국에 정착하게 되는 데, 맨 처음엔 University of Michigan (Ann Arbor)에서 Artist-in-Residence로 와있었다. 그가 그 당시 미시간 대학 신문 인터뷰 기사에서 밝힌 러시아 재판정에서 있었던 에피소드는 예술철학의 가장 중요하고 골치 아픈 문제의 핵심을 찌르는 것이다. 불량 반체제 인사로 체포된 그가 법정에 섰을 때, 재판장은 그에게 물었다. “당신 뭐하는 사람이요?” “나는 시인입니다.” 이 대답에 재판장은 또 물었다. “누가 당신을 시인으로 만들어 주었소?” 대답을 머뭇거리자, 재판장은 책상을 손으로 치며 화를 냈다. “제 멋대로 시인이라고 자처하고 다니는 건달아냐? 당신 러시아 문인협회 회원으로 받아들여진 적 있소?” “아니요. 그럼 저도 묻겠습니다. 저는 누가 인간으로 받아들여 주었기 때문에 인간인가요. 허긴 제가 지금 인간으로 취급 받고 있지 않아서 그런 질문과 질타가 있는 것일 가요?”

도대체 누가 시인입니까? 그 정의가 무엇입니까? 한국사회에선 일반적으로 문단에 등단의 절차를 밟은 자만이 시인이라고 자처할 자격이 있는 것같다. 그러나 그런 절차에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등단하려면, 그가 쓴 시가 어떤 기존의 평가 기준에 의해 좋은 시라고 인정을 받아 이런 저런 문학상을 수상하여야 문단에 등단하는 절차를 받게 되는 데, 그렇다면 나쁜 시를 쓰는 사람은 시인이 아니란 말인가? 아니 누가 이건 시고 저건 시가 아니라고 말할 근거를 마련한 적이 있기나 한 것 인가?

또, 도대체 누가 예술가로 자처할 수 있고 누군 그럴 자격이 없는 것인가? 여기에 대한 대답이 없는 것은 아니다.. 가장 잘 알려진 이론 중의 하나는 소위 말하는 Institutional Theory of Art(1)라고 해서, 결국은 그 사회의 구성원들의 합의에 의해서 정의된다는 것이다. 언어라는 것도 그 언어를 구사하는 사회공동체의 합의에 의해 소통이 가능한 것처럼, 예술도 하나의 인간의 사회 행위로서 그 사회의 구성원들이 무의식적이건 의식적이건 함게 전제하는 합의가 있기 때문에 예술행위(그것이 작품 생산이건 공연이라는 이벤트이건)를 가능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이론이 전위예술행위에 대한 설명이나 규정에는 적합치 않다는 것이다. Arther Danto나 그를 따른 George Dickie는 자기네 예술론이 전위예술현상을 잘 설명할 수 있기 때문에 다른 기존의 예술론 보다 우월한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Marcel Ducamp의 ready-made를 예술 작품으로 간주하도록 하는 것은 그것이 화랑전시라는 “예술세계” (그 사회에서 공용되는) 공간에서 전시되었기 때문에 예술작품성을 갖게 되었다는 괴변을 늘어 놓았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이미 Ted Cohen이 어떻게 George Dickie가 Duchamp의 행위를 잘못 짚었는 지를 Speech Act이론을 근거로 설득력있게 보여주었다.(2) 그런데도 불구하고, 언어철학에 소양이 없는 (전위)예술가들이나 예술역사가들 또는 예술비평가들이나 예술 뉴스 기자들은 Duchamp의 행위를 잘 못 이해하고는 마치 듀샹이 새로운 예술의 지평을 열고 새로운 예술의 언어를 제시한 양, 계속 흉내를 내어 “행위예술”이라는 쟝러를 만들고, 그 것은 또 백남준에 의해 “비디오 아트”라는 이름으로 탈바꿈까지 하였던 것이다.

Ted Cohen의 주장처럼Institutional Theory에의한 전위예술행위나 이벤트의 설명이 개념적인 오류나 무지에 의한 것이었다면, 그 이후에 서구예술중심지에 계속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행위예술이니, 비디오아트니, 개념예술이니 하는 등등의 제 예술행위는 ‘사기행위’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사실 듀샹자신도 자신이 변기를 전시했을 때 그것을 예술작품으로 낸것이 아니라 하나의 저항의 제스춰에 불과한 것이라고 전확히 알고 있었다는 것은 그가 그 후 약 20여년간은 예술행위를 멈췄다는 것에서 알 수 있다. 즉, 예술은 끝났다고 생각하고 장기나 두면서 소일했던 것이다.) 서구 예술의 사기성은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사실, Arthur Danto나 George Dickie의 Institutional Theory of Art는 결과적으로는 오류지만 어떻든 전위예술을 설명하기 위한 노력인데, 엄밀히 따지자면, 이 이론이 새로운 것이 아니다. 이 이론은 이것보다는 좀더 포괄적이고 심도있는 Conventional Theory of Art의 변형이라고 보면된다. 사실, Conventionality of Art는 명료하게 설명이 가능하다. 즉, 모든 예술행위는 사회행위(Social Act)라는 모든 사람이 동의할 수 있는 명제에서 시작한다. 그런데 모든 Social Act는 그 사회구성원의 암묵적인 합의, 즉 Convention을 전제로 한다. 그러므로 모든 예술행위는 ConventionalGrammar를 전제로 한 사회행위이다라는 것이다. 하이덱거와 더부러 20세기전반부의 2대 천재 철학자의 하나로 추앙 받는 Ludwig Wittgenstein은 같은 결론에 대해 이런 말로 대신했다: “자기 혼자만 이해하는 언어는 없다.” 이것이 유명한 “Impossibility of Private Language”의 이론이다.

18세기 중반에 서양에서는 그것이 미술이건 음악이건 문학이건, 에술에서의 서양문명권의 차원에서 공동으로 암묵적으로 전제하던 convention of art (또는 예술의 언어나 문법이라고 불러도 좋다) 의 합의가 깨어져 버렸다는 위기 의식을 예술가들은 어렴픗이 의식하고 있었다. 그런 합의가 없어졌을 때, 사회행위로서의 예술은 어떻게 계속될 수 있는 것인가? 이것이 바로 역사의식이 있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첨단 예술가들이 당면한 문제요 명제였다. 그 이후에 전개되는 서구의 예술사는 모두 한결같이 이런 문제의식을 전제하고 나름대로 그 해결책을 강구하는 행위로 나타나게 된것이다. 이런 서구 정신문명의 위기를 Stanley Cavell은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What characterizes the situation in modern arts today is the pervasive possibility of fraudulence.”(현대예술이 처한 상황을 가장 잘 특정지어주는 것은 항상 내재하는 ‘사기’의 가능성이라는 것이다..)(3) 서구의 모든 예술분야에서의 암묵적으로 전제되었던 합의의 문법들이 제 구실을 못하게 된 상태에선, 더 이상 무엇이 예술이고 무엇이 예술이 아니라고 판별할 모든 가치기준이 깨어져, 누구나 어떤 미친 짓을 하고도 예술행위라고 주장하면 그것은 아니라고 비토할 모든 근거가 없어져버렸다는 말이다. 그래서, Anything goes!라는 말이 생겨난 것이다. 즉, 화랑이라는 공간에 들어 가서 어떤 미친 짓을 해도, 그것은 전시로 포장된 이상 미술행위로 간주되고 그 행위자는 예술가로 인정 받게 되었다는 말이다.

지금 세계 예술문화의 중심지라는 뉴욕, 런던, 파리, 독일의 베를린, 동경, 서울 등의 미술관에서 일어나는 거의 모든 예술이벤트들, 베니스 비에날이니, 카셀 도큐멘타니, 광주 비에날이니 부산 비에날이니 하는 비에날들에서 일어나는 예술행위니 예술 벤트들이 하나 같이 이런 류의 “Anything Goes!!” 의 사기성 예술이라고 보면 된다. 세계의 중심지 예술이니 첨단예술이고 바로 그런 예술형식을 우리(한국)도 따라 해야 다는 그런 생각들을 하고 있고, 그래서 베니스 비에날레 같은 데 초청을 받으면 크게 출세한 것처럼 한국의 신문 방송에서는 떠드는 데, 사실은 그것은 조금만 다른 시각에서 볼 것 같으면, 기껏해야 서구의 정신문명적인 공황상태에서 공허한 허무주의적인 제스춰나 하고 있는 서구예술을 중심지 예술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또 다른 사대주의요 식민사관/문화관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바로 이런 위기의 서구 문화/문명의 상황을 End of Art라는 말로 Arthur Danto와 독일의 Hans Belting는 표현하였다(4) 이런 End of Art의 역사적인 상황에서 ‘사기’ 아닌 예술은 어떤 방식으로 계속될 수 있을 가? 그런 방식이 있긴 있는 것인가? 있다. 그러나 그것은 서구자본주의 체제 속에서의 예술시장을 중심으로 형성된 institutional structure 속에서의 예술가로서의 예술행위는 아니다. 그것은 사기일 뿐이다. 그런 사회에서는 오히려 억압되어 망각되었던 다른 의미의, 아니 좀 더 진정한 의미의 예술을 되찾아야 한다. 어떻게?

서양의 예술역사에나 기술되는 그런 예술행위보다 좀 더 넓은 의미의 예술을 생각해야한다. 그래서, 직업예술가들이 빼았아가 자기들의 전유물로 만들었던 예술을 본연의 자리에 되돌려주어야한다. 그 본연의 자리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은 모든 인간이 다. 예술가라는 것이다. 사실은 하루 하루 살아가는 것이 예술 그 자체여야 되는 것이다. 보통 사람들의 예술행위를 보통사람 들의 언어행위 (Ordinary Language Philosophy에서 말하는 Speech Act)에 비유하면 이해가 빠를 것같다. 사실은 서구자본주의 세계의 문화문명의 가장근본적인 정신적(spiritual)바탕의 붕괴는 심지언 서구의 일상언어행위조차 어떤 위기상황으로 몰고 왔다는 것이다. 그런 위기는 이미 심각한 도덕적인 위기로 나타나고 있으며, 그래서 Stanley Cavell의 Samuel Beckett의 End Game에 대한 해설에선 이런 해석까지 나온다. 즉, Beckett의 이 희곡이 독특한 것은 그 작품 속에서 나오는 언어구사라는 것이다. 보통 사람들이 언어를 구사하여 상호 소통하기 위해, 그들이 단어를 선택할 때는 그 단어의 사전적인 Lexical Meaning 이외의 다른 어떤 Associational Meaning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Beckett의 End Game에 나오는 모든 문장들을 구성하는 모든 단어들은 한결같이 각 단어의 Lexical Meaning만으로 그 문장의 전체적인 의미를 도출 하도록 하였다는 것이다. 즉, Literal Meaning만으로 deep structure에서 받쳐주는 syntactic structure로서의 문장. 왜 이런 과격한 언어행위를 이 작품에서 이 작품의 핵심 창조 원리로 삼았나? Stanley Cavell에 의하면, 일상언어가 하도 망가져서 이제는 그 언어가 진정한 의미의 소통의 수단으로 문제가 있어, 그 언어의 가장 시원적인 Literality Condition으로 되 돌아가서 언어를 정화시켜 다시 인간다운 소통이 가능하게 하자는 그런 궁극의 목적과 의미가 깔려있다는 것이다. 필자는 똑 같은 현상이 미술과 음악에서도 나타나고 있었다는 주장을 펼친 있다. 즉, 미술에서의 모더니스트들의 미술적 추구는 바로 미술이라는 매체의 Literality Condition을 새롭게 재 인식하여 우선 그 조건에 걸맞는 미술을 하면서, 지금까지의 모든 전통적인 미술행위를 역사적으로 해체하자는 적업이었다는 해석을 내놓은 바 있다. 즉, 그런 추구는 미술의 죽음, 음악의 죽음, 문학의 죽음으로 표출되는 수 밖에 없다는 결론이었다.

II. 넓은 의미의 예술 행위:

그럼 다시 시작하자. 예술이 죽은 다음엔? 공허한 허무주의 제스츄어로서의 ‘사기’예술이나 하고 있는 뉴욕이나 파리나 베를린의 전위니 첨단을 자처하는 예술가들과 같은 작업을 해야 하나? 아니면 다른 선택의 여지가 있기라도 한 것인가? 우선적으로, 서구의 작금의 예술문화의 위기 상황은 그들의 고유한 역사적인 경험 속에서 그들만의 역사적인 변증법적 필연성과 논리의 산물이라면, 한국인이나 동양인들은 분명히 그 서구의 역사적진개의 Outsider인데, 왜 구태여 그들의 바람직하지 못한 비극적 운명을 함게 걸머지려고 하는 것일가? 물론 동북아시아인들도 어떤 강제성을 갖고 서구의 역사적인 전개에 편입된 감이 없지 않지만, 그래도 outsider로서 자기들의 내부적인 역사적 경험에서 필연적으로 나온 허무주의적 말로에 왜 그렇게 기꺼이 동참해야할가? 바보 같은 짓이 아닐가?

한국인으로 세계적인 예술가라고 추앙 받는 백남준씨가 “예술은 사기다”라고 한 말이 곧잘 인용되고 있지만, 그의 진의를 제대로 분석하고 해석한 기사는 본적이 없는 것같다. 국내에서 백남준 전문가를 자처하는 미술비평가들도 이 말의 중요성을 간과하고 있다. 관연 백남준은 뛰어난 예술역사적 직관으로 End of Art의 상황을 인식하고 있어서, 그 후의 모든 예술행위는 “Anything Goes!”가 되었다는 것을 알고 한 말인지 아니면, 그냥 어떤 효과를 위한 말 장난이었는 지는 분명치 않다. 아무튼, 그는 서구 허무주의자들의 마지막 사기극의 게임이나 하는 서구 예술세계에서 그 게임을 서구의 어느 누구보다 더 잘했다면, 그것은 나름대로 뛰어난 능력을 과시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그런 서구의 문화문명적인 위기상황에서 서구예술의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한 위대한 예술가냐하면, 그 대답은 분명히 아니요다. 그는 서구 전위예술의 사기극을 극복하려고 한 사람이 아니라, 그 사기극을 즐기며 그 게임을 잘한 사람이다. 그 세계에서는 화려한 승자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서구 전위예술의 중요성은 그들이 내용있는 어떤 감동을 주는 훌륭한 예술행위를 하기 때문이 아니다. 그들의 중요성은 그들의 생각없는 (자기들은 생각있다고 생각하겠지만) 예술이라는 이름의 작업들이 그리고 그들이 계속 서구사회에서 생존하고 있다는 것이 바로 서구문명의 마지막 단계에서의 허무주의를 가장 잘 눈에 뛰는 증상으로서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들은 병든 서구역사의 증상일 뿐이다. 그래서 그 역사적 전개를 이해하고 해석하는 데 좋은 자료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예술역사라기 보다는 사회역사또는 문화역사에 소속된다.

그러면, END OF ART 이후의 예술은 아예 없는 것일가? 아니다. 오히려 예술 본연의 모습을 되 찾을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는 것이다. Ordinary Language Philosophy에 비교되는 Ordinary People’s Ordinary Art로 명명하면 좋을 것같다. 또는 소박한 예술이라고 불러도 좋다. 자연인으로서의 모든 인간이 하는 행위는 모두가 Social Act (사회행위)일 수 밖에 없다. 인간은 사회적인 존재인 것이다. 넓은 의미의 예술행위란 역시 사회적 재로서 타자들과의 소통을 위한것이다. Immanuel Kant가 한 이 말을 떠 올려보자.: “Art is an expression of a very basic human aspiration towards a perfect community.” 그리고 또 한 마디 더: “This very human aspiration is the ground for the possibility of human spirituality.” (5) 인간은 그냥 물질적인 존재가 아닌 영혼이 있는 정신적 존재이고 인간이 그럴 수 있는 것은 바로 서로간의 특별한 소통을 추구하는 행위, 즉 예술행위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개념의 예술은 직업예술가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인간이기 때문에 모든 인간은 예술적인 행위를 추구하게 되어있다. 다만, 살아가는 동안에 인간은 인간의 본연의 모습을 망각하고 기계적으로 자기들 스스로 만든 족쇠 속에서 영혼과 정신성도 잃어 버리고 황폐화의 길을 걷은 삶을 살게 된다. 그것이 인간의 비극이라면 비극인 것이다. 그런데 반드시 거대 종교에 귀의치 않고도 그런 황폐화의 길을 걷는 일상 속에서 순간 순간에 순간적인 구원의 가능성이 모든 인간의 두뇌에 hard-wire되어있다.

일상 속에서의 순간적인 구원의 가능성이 어디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일가?(6)
다음과 같은 상황을 한번 상상해 보라.. 매일 50명의 학생을 가르키는 초등학교 선생이 있다고 하자. 그녀의 시야에는 모든 50명의 얼굴이 들어와있고 하나하나 다 익숙한 얼굴이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한 학생의 얼굴이 눈에 들어옵니다. 마치 처음 대하는 것처럼. 그 학생을 다른 어느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매일 보아왔음에도 불구하고 오늘에야 비로서 이 학생의 존재가 눈에 들어와 각인 됩된 것이다. . 영어로는 이렇게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 즉, I’ve seen these faces every day for the past three month. Each of their faces are very familiar to me. Yet, it is only today that I have noticed this one student. Only today her face has struck me. “See”라는 단어로 묘사되는 시각적인 경험들은 내 시야에 들어 오는 모든 대상에 자동적으로 적용되는 그런 기계적인 “보기”이다. 반면에, “Notice”는 그냥 관습적인 기계적인 ‘보기’가 아니라, 어떤 예기치 못한 요소가 있어서, 이 대상이 내 눈에 뛰어 들어 오는 것 같은 시각적인 경험이 있을 때 적용되는 단어이다. 일상 속에서의 익숙한 것이 어느날 갑자기 새롭게 보여질 때, 그 때 우리 인간은 짐짓 놀라게 되는 것이다. “아니, 지난 10년을 계속 지나다니는 길가에 서있는 조그만 건물인데, 오늘에야 내 눈에 새로운 의미로 들어오다니 . . . 참 놀라운 일이야.” 남녀 사이에도 그와 비슷한 경험들은 많다. 매일 만나면서 그냥 허물없이 지나던 직장 동료인데 오늘 갑자기 그녀가 다르게 보인다. 이성으로 보인다. 이런 경험에도 notice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묘사하는 것이 적합할 것이다.

일상의 사소한 것에서 발견한 새로움은 사실은 조그맣게나마 나를 변하게 하는 것이다. 아니 거기서 환희를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보통 사람들은 인생의 중요한 사건이 될지도 모를 일에 대해 사소한 것으로 보거나 관심을 보이지 않고 그냥 지나쳐버린다. 그런 식으로 계속 인생을 살게 되면 인생은 지루하고 반복되는 일로 가득 찬 감옥 같은 삶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그래서 익숙한 일상에서 새로운 것을 찾을 수 있는 것은 기쁨인 것이다. 그것이 자신에게도 놀라운 것이다. 그럴 때 우리 인간은 다른 어떤 같은 동료 인간에게 손을 내밀고 싶어하는 것이다. 즉, “나는 이 걸 이렇게 보았는 데,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This is what I saw. Do you what I see??)(6) 가장 순수한 의미에서의 인간과 인간의 연결을 위한 소박하고 절실한 제스춰인 것이다. 아무런 사적인 손익 계산 없이 순순한 sensibility의 차원에서 대화를 시작하자는 것이다. 진정한 우정도 사랑도 이렇게 소박하게 시작되는 것이다. 이런 가장 순수한 일상의 기계적 관습에서 벗어난 소통의 제스춰, 그것이 바로 예술행위인 것이다. Notice하여 다른 동료 인간한테 “Do you see what I see?” 라는 차원에서의 대화 (“Calling attention of others to what I have noticed.”), 그리고 그 타자가 공감하여 주었을 때, 그래서 우리 (나와 타자)가 함게 내가 notice한 것을, 그 감정을 그 새로운 시각을 또는 깨달음을 SHARE했을 때, 우리는 “Art has transpired.” 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때 비록 짧은 순간에나마 두 영혼간에 아무런 벽이 없는 칸트가 언급한 그런 완벽한 소통이 있었고, 바로 그런 진정한 영혼의 만남의 뿌듯함을 통해 순간적으로나마 구원을 경험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영구한 구원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순간 순간을 진실하게 자신의 존재를 실감하며 살아가자면 그것이 이 세상에서의 1차대전전 제정 러시아의 쌍페테브르그에선 Formalist Circle이라는 미학, 철학, 문학 서클이 있었다. 이들의 예술론은 이러했다. “Art is a technique for making what is familiar unfamiliar.” 이게 바로 Victor Shklovsky의 예술론이다. 러시아말로는 “OSTRANENI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