균질공간(Universal space)

Lee Kyo jun

2018-03-05 - 2018-04-05

인식의 미술, 공간의 미술

이교준의 작풍은 단순하다. 매끈한 평면 위에 몇 개의 사각형의 배열, 그게 전부다. 평면을 이루는 재질로는 목면천(cotton duck) 혹은 알루미늄판, 나무판이 등장한다. 그리고 평면 위로 수직과 수평이 교차하면서 반듯한 형태의 사각형이 등장한다.
그 사각형은 엄정한 기하학적 구조에 붓질이 없는 무채색의 색면을 취한다. 과거의 작품에는 밝은 유채색의 색면이 등장한 적도 있었지만 이 경우도 색면의 표현성보다는 사각형이란 기하학적 구조의 엄정성이 더 압도적인 형국이었다. 이교준의 사각형에는 ‘표현’이 거의 없다. 이교준의 작품세계를 일관되게 관통하는 특징으로 ‘표현이 거의 없는 사각형’을 들 수가 있다. 그 사각형의 전모를 규명하는 일이 곧 이교준의 작업에 대한 이해로 이어질 것이다.
표현(expression)이란 에스프레소(espresso) 커피를 짜내듯 내부와 외부의 압력의 차이에서 발생한다. 과도한 내부의 압력이 낮은 압력의 외부를 향하여 분출되는 것이 표현이다. 그 내부를 가진 주체는 일인칭에 다름 아니다. 표현의 붓질이란 내부의 높은 압력을 감압시켜가며 압력이 낮은 외부의 세계로 이어주는 통로인 것. 고독한 신체를 끌어다 광막(廣漠)한 우주로 연결시켜주며 동시에 그 우주를 막연하게 더듬으며 이를 작가의 신체로 되돌려 감지케 하는 게 표현의 붓질이리라.
붓질의 연결이 없는 미술, 일인칭의 표현이 전혀 드러나지 않는 미술은 왠지 생경하다. 표현이 없는 미술은 일인칭이라는 내부의 압력이 없거나 일인칭 그 자체를 버린 지점에서 성립되는 미술이다. 나를 버린 채, 비인칭의 세계에서 돋아나는 미술이다. 나의 입장을 무시하고 광막한 우주에서 곧바로 시작하는, 표현이 없는 미술을 위해선 작가의 사유의 도약과 태도의 단호함이 요구된다. 일인칭적인 지각(知覺)의 층을 돌파하여 곧바로 비인칭의 인식(認識)에서 출발하는 미술은 대부분의 작가들에게 어색하고 부담스런 일이다. 이교준은 과감하게 지각의 레이어를 돌파하여 인식의 차원에서 곧바로 조형작업을 시작하려 한다. 이런 점에서 그의 작업의 토대가 되는 매끈한 평면은 반반한 물성으로서의 평면이 아니라, 수학에서 규정하는 2차원 평면이란 개념 그 자체로 여겨도 무방하리라.

이교준에게 사각은 무엇인가? 그건 우선 수직과 수평이 만나는 일이다. 수직과 수평의 숫자나 배열의 방식에 따라서 사각형의 형태와 구성이 달라진다. 수직과 수평은 장소성의 중력을 품고 있다. 수직과 수평을 떠올리는 순간 장소성이 암시되고 지각이 개입할 틈을 찾게 된다. 수학적인 공간으로서의 평면은 지각을 불허한다. 오직 인식만이 개입이 허용된다.
인식만이 도달할 수 있는 비인칭의 수학적 공간은 중력이 작용하지 않는 균질공간(universal space)이다. 지각을 벗어나 인식의 미술을 도모하는 이교준의 작업은 균질공간이라는 토대 위에서 성립하려 한다.
수직과 수평이 암시하는 장소성의 평면이 아닌 균질공간을 설명하는 개념으로 데카르트가 창안한 XY축으로 그의 평면과 사각형을 설명하는 일이 더 적절해 보인다. 균질공간이라는 것 자체가 인식의 세계가 도출시킨 하나의 개념이다. 이교준의 작업을 개념미술이라고 보는 것은 그의 평면과 사각형이 균질공간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개념미술은 국내의 미술작가들에게 낯설고 어색하다. 개념미술을 끝까지 밀어붙이는 국내의 작가는 극히 드물다. 무엇이 그로 하여금 사각형의 단순한 형태로 환원된 화면을 지속적으로 운영하는 개념미술 작가로 이끌었을까.
이교준이 인연을 맺은 두 사람을 떠올려 본다. 황현욱과 도널드 져드다. 20대의 청년시절 이교준은 대구에서 황현욱을 만나 함께 현대미술을 공부했다. 그들은 현대미술이라는 공기를 오랫동안 함께 호흡했다. 황현욱은 작가였고 이론가였고 갤러리스트였다. 그가 운영하던 서울의 인공갤러리에서 미니멀 아트의 대표적인 작가 도널드 져드의 전시가 열렸다. 이교준은 전시를 위해 한국을 찾은 도널드 져드의 안동 여행에도 동참했다.
황현욱의 영향을 받은 작가는 많다. 도널드 져드의 영향을 받은 작가도 많다. 두 사람의 영향을 동시에 받은 작가 또한 많다. 그런데 이들 중에서 왜 유독 이교준이 극단적인 인식의 미술인 기하하적 환원주의의 작업을 집요하게 끌고 가고 있는가.
대구지역 작가들에게는 성리학(性理學)이라는 생이지지(生而知之)의 정신적 토대가 있다. 성리학은 성(性)과 리(理)의 사유와 실천이다. 리(理)는 자연계와 우주의 항상적인 원칙과 법칙을 말한다. 리(理)는 변화무쌍한 현상계의 이면에 숨은 상수(常數)로서의 본질의 세계를 인식하려 한다. 리(理)는 질서정연한 인식의 세계로 장소와 지각의 소실점을 벗어난 공간의 층위에서 구축된다. 리(理)를 수신(修身)의 개인이 받아들이고 삶 속에서 실천하면 성(性)이 된다. 성(性)은 일인칭이 거하는 장소에서 성립한다. 수신을 중시하는 성리학은 성(性)에 더 방점을 둔다. 성리학은 동북아의 여러 철학 중에서 가장 강력하게 리(理)라고 하는 공간의 층위를 지향하는 편이긴 하나 어디까지나 장소의 철학이자 사유방식이다.
이와는 달리 이교준은 철저하게 리(理)의 작가다. 장소와 지각의 소실점을 벗어나 공간의 철학과 사유방식을 선호하는 작가다. 작업이 처음부터 공간과 인식의 층위에서 출발한다.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을 함께 묶어서 부르는 데서 알 수 있듯, 인식의 지(智)가 독립적으로 공백성(空白性)의 공간으로 비약하지 못하고 장소성이 강한 인의예신(仁義禮信)과 함께 묶여지는 것이 동북아적 사유방식의 특징이다. 이런 풍토 속의 작가들은 리(理)보다는 성(性)의 기질이 강한 게 일반적이다.
이교준은 이런 기질의 작가들과는 달리 지(智)가 따로 분리되어 공간의 층위로 비약한 서구인들의 사유방식에 더 가까운 작업을 이끌어간다. 이교준의 작업에서는 일인칭의 내면 등 장소성과 연계된 요소들은 과감히 배격된다. 처음부터 인식이 공간의 층위로 비약한 상태에서 작업이 시작된다.

그가 공간으로 비약할 수 있었던 이유의 하나로 황현욱이 그러했듯, 건축에서 재능과 역량을 보였다는 점을 들고 싶다. 건축이란 무엇인가. 비균질의 장소에서 균질한 공간을 상정한 다음, 공간의 질서에 따라 분할과 재배치를 거쳐 기존의 장소를 새로운 장소로 만들어내는 작업이 아니던가. 장소와 공간을 구별하고 지각과 인식의 역할을 분담하여 이를 최종적으로 통합하는 작업이 건축이다. 기하학(geometry)이 땅(geo)의 장소성과 공간의 수학적 질서(metry)라는 두 개의 분리된 층위의 설정에서 성립하듯, 건축도 장소와 공간이라는 두 층위의 분리와 통합이 필수적이다.
이교준이 공간의 층위에 대해 분명한 이해과 인식능력을 가졌을 뿐 아니라 선명하고 단호한 태도를 취하는 건 그의 건축적 역량, 경험 등과 관련이 깊어 보인다. 건축에서 주로 찾아야 할 공간이 사각평면이듯 그의 작업 또한 사각평면으로 자연스럽게 나아간다.
건축에서 수직과 수평이 만들어내는 사각평면으로 벽을 들 수가 있다. 벽은 장소를 시각적으로 차단한다. 시각의 닫힘으로 인해 인간만이 가진 인식의 능력 즉, 내관(內觀introspection)의 기능이 작동하기 시작한다. 시각 등 지각이 미칠 수 있는 소실점까지가 장소의 세계다. 공간은 지각을 멈추고 내관으로 인식해야만 돋아나는 세계다. 건축에서의 벽은 지각의 진행을 막고 장소를 닫으면서 소실점 너머의 공간을 열어주는 셈이 된다. 이교준의 사각평면이 원근법이 성립되는 장소의 사각이 아니라 내관에 의해 균질공간으로 트인 인식의 사각이라는 점도 이 지점에서 설명이 된다.
캔버스에 놓인 몇 개의 사각형에 얹힌 색이 공간을 향해 열리는 것 또한 이 순간부터다. 색즉시공(色卽是空)이라 하였을 때 색(色)은 현상의 지각으로 있음, 공(空)은 본질의 인식으로서 있음을 뜻한다. 동일한 있음이 색의 있음이 되기도 하고 공의 있음이 되기도 한다. 색은 장소에서의 있음이고 공은 공간에서의 있음이다. 현상의 차원에서는 닫힌 장소의 있음이 본질로서 열린 공간의 있음으로 비약하는 것이 이교준의 사각형 색면이다.
이교준은 캔버스라는 사각평면 안에서 분할된 사각형을 찾아낸다. 이는 사각캔버스라는 전체를 또다른 사각형이라는 부분으로 쪼개고 나누는 일이다. 리(理)에는 나누고 쪼갠다는 뜻이 있다. 서양에서는 라티오(ratio)라고 한다. 이성(理性 ratio reason)은 기하학의 현실적인 출발 이유와 마찬가지로 각자 자신의 몫을 합리적으로 나눈다는 뜻에서 나왔다. 개인이 지각하는 자신의 몫은 애매하기 때문에 리(理)의 수학적 원칙으로 제압한다.
리(理)의 세계는 단순명쾌하다. 리(理)를 구현하기 위해선 애매모호함을 소거하는 환원작업이 필요하다. 평면에 X축과 Y축을 상정하고 화면을 쪼개고 나누면서 사각 캔버스 속에서 수많은 사각형을 찾아내는 이교준의 작업은 전형적인 라티오의 작업이다. 라티오는 애매모호하고 변화무쌍한 장소성을 배격한다. 항상성을 갖는 공간의 층위에서만 라티오가 명확하게 성립한다.
이교준의 캔버스 위에 겹친 인식의 공간에는 무수한 X축과 Y축이 지나가고 있다. 어떤 범위의 축을 포착하느냐에 따라 색면의 사각형의 형태와 배열방식이 결정된다. 어떤 구조의 사각형이 되든, 지각과 장소의 색면을 공간의 층위로 이끌어내면서 열림의 있음으로 이끌어내는 게 이교준의 작업이 주는 매력이다.
이교준의 작업은 명징하다. 견고한 구조와 높은 완성도는 의식이 상승하는 염결주의를 느끼게 한다. 장소의 사각형은 칸막이를 치면서 사유를 가두려 하지만 공간을 암시하는 칸막이는 사유를 트이게 한다. 엄중한 인식의 미술인 이교준의 작업에서 모순되게도 질서정연한 의식의 상승감 뿐 아니라 조형적 쾌감을 느끼는 건 이러한 열림의 해방감 때문이리라.

황인 黃寅 Hwang, In




The Art of Awareness, the Art of Space

The works of Lee Kyojun have a simple air about them. A few rectangles positioned atop a flat, smooth surface is all it consists. The surfaces are usually of cotton duck canvas, aluminum, or wood material upon which perpendiculars and parallels crisscross to bring neat rectangles to the picture.
The rectangles of a disciplined geometric structure sport achromatic colors with no marks of brushstrokes. Bright chromatic colors have often appeared in his previous works but even then the geometric structural sternness of the rectangles are far more accentuated than the showing of color. We notice Lee’s four-sided shapes lack almost all forms of expression, a theme that runs through his entire body of works. Defining the story behind his mundane rectangles ultimately leads us to the understanding of his work.
Much like espresso that is extracted using the difference in pressure between the inner brewing chamber and the outside environment, so does an “expression” come into being, the highly pressurized inside bursting on to a relatively loose outside. The entity that commands that bridled internal realm is what we call the self in the first person. Expressive brushstrokes are the pathways that link the outside with the compounded inside through adjustments of such high intensity, the very thing that connects the isolated self to a vast universe of sorts, thus allowing the artist’s body to blindly touch and feel its way into the truth it has to offer in return..
Art that lacks revealing brushstrokes or expressions in the first person is rather unfamiliar. Expressionless art is one that has either no internal build-ups that need to be released or been constituted without the first person perspective entirely. The self is discarded and the art is born from the lack there of, from the realm of the impersonal. To practice such art free of expression, born straight from the expanse of the universe and irreverent of the personal perspective requires a leap of thought and hard determination by the artist. Art that leaves the perception level of the first person and lifts off from the “non-person” awareness, the impersonal, has to be foreign and a burden to artists. But despite that, Lee boldly breaks through that layer of perspective and attempts to create works of form straight from the awareness level. In that sense, we may assume the smooth flat surface that forms the basis of his work is not just a plane of physical characteristics, but a concept of a mathematically defined two dimensional plane itself.
So what then are the rectangles to Lee? First and foremost, they are the meeting of the perpendiculars with the parallels. Depending on the number and layout, the form and structure of the consisting rectangle will vary. What the perpendiculars and parallels embody is gravity, a condition of place that gets called up when thinking of them, thus possibly letting perception to find its way in through the cracks. But a plane as a mathematical space does not allow for such room. It only accepts the involvement of awareness.
It is a universal space, an impersonal mathematical space that can only be reached by awareness. The work of Lee, escaping perception and created within the art of awareness, attempts to be established atop this so called universal space.
The Cartesian plane x and y axes appear to be the better suited concept in explaining Lee’s planes and rectangles, rather than using the plane with characteristics of place suggested by the perpendiculars and parallels. Universal space itself is a conceptual child born of a world of awareness, and as it appears his planes and rectangles reside in that world Lee’s work can be seen as conceptual art. Foreign and unfamiliar, artists at home are still not too friendly with conceptual art and you seldom find Korean artists dedicated to this art form. What is the influencing factor that led Lee to continue adopting the ever simplified picture of rectangles and into the path of a conceptual artist?
It is more of a matter of who than what, and two people in his life come to mind: Hwang Hyeonwook and Donald Judd. In his 20’s, Lee meets Hwang in Daegu and they study contemporary art together, living and breathing the same artistic air for a long time. It is at Ingong Gallery in Seoul operated then by Hwang, the artist, theorist, and gallerist, where the exhibition of the iconic minimalist artist Donald Judd’s was held, and where Lee meets and accompanies Judd – who was visiting Korea for the exhibition – on a trip to Andong.
Many artists can say they have been influenced by Hwang. Many can say Judd was the strong artistic force in their lives, and just as many can say they have been affected by both legends together. Why then does Lee seem to stand out from those affected to stubbornly carry out the extreme art of awareness by way of geometrical reductionism works?
To understand Lee we need to first understand that artists from the Daegu region have the spiritual backbone of sunglihak 性理學 or Neo-Confucianism, known to them from birth. Neo-Confucianism is the contemplation and practice of the concepts sung 性, meaning the true nature of someone or something, and li 理, which refers to the enduring principles and rules of nature and the universe. It is about becoming aware of the world of essence, the invariable hidden in the other side of the ever changing phenomenal world. Seen as an ordered and organized realm of awareness, it is built upon a spatial layer beyond the vanishing point of both place and perspective. When an individual practicing sooshin – the philosophy of cultivating the mind and body by ridding evil and promoting good – accepts and practices li 理 in life, sung 性 is obtained. Considering sooshin to be of much importance, Neo-Confucianism places more stress on the concept of sung 性 that resides in the domain of the first person self. While it is definitely one that is strongly geared towards a spatial level of li 理among the various North Eastern philosophies, Neo-Confucianism is still just a philosophy of place and a way of thinking.
Lee on the other hand is strictly a li 理 kind of an artist, preferring the spatial philosophy and way of thinking that goes beyond the vanishing point of place and perspective. His works departs from the level of space and awareness from the very start. As seen in the five constant virtues of Confucianism – benevolence, justice, propriety, wisdom, and integrity – it is typical of North Eastern thought to group wisdom – pertaining to awareness – with the remaining four that have strong qualities of place, as it is seen as being unable to fill out its own existence in the realm of space. Artists coming from such a philosophical climate therefore usually exhibit attributes more pertaining to sung 性 rather than li 理.
But unlike them, Lee produces work that follows a form of thinking resembling that of Westerners, where wisdom breaks away from the other four constants and flourishes on its own on a spatial level. He boldly does away with qualities of place such as the internal workings of the first person, and his work begins from the point where awareness has already transcended into the level of space.
Much like Hwang, Lee’s successful flight into the spatial domain can be attributed to his skills and abilities in architecture. Architecture is in itself a process of first designating a homogenous space from within a heterogeneous place, dividing and rearranging according to the order of the given area, thereby giving birth to an entirely new space from a preexisting one. It is about differentiating place and space and the specialization of tasks between perception and awareness, finishing with the overall unification of it all. As geometry comes from combining the qualities of place of earth geo- with the mathematical order of space -metry, the division and unification of the two levels of place and space is essential in architecture.
Not only does Lee have a distinct understanding and awareness about such levels of space but his apparent and unyielding attitude towards them appear to be a result of his architectural capabilities and experiences. As the type of space most commonly sought in architecture is rectangular planes, his work naturally goes forth with this element included.
An example of a rectangular plane created by perpendiculars and parallels is a wall. Walls restrict a space visually, the optical obstruction triggering introspection which is an exclusive ability of human beings. The domain of place includes all areas covered by perception such as sight and extends all the way to the edges of the vanishing point. Space is a world that emerges only when one halts perception and uses introspection to become aware of its existence. In a way, walls in architecture may thwart the progress of perception but instead opens us up to the space that lies beyond the vanishing point. And with it we understand that Lee’s rectangular planes are not of place where rules of perspective applies but are those of awareness, homogenous spaces opened up by way of introspection.
It is from this point the colors of the rectangles laid atop the canvas open up into space as well. Looking at the Buddhist idea of saekjeukshigong 色卽是空, which means “form is but emptiness”, saek 色 meaning form, exists as a result of perceiving an actual phenomenon, while gong 空 meaning emptiness, exists by being aware of its essence. The word “existence” can be used for both cases, being an existence of place for form and space for emptiness respectively. Lee’s color faces are his way of allowing such confined existence of place of phenomenal dimensions to uplift into the unrestrained spatial existence of essence.
Lee manages to divide his given rectangular plane of a canvas to further uncover additional rectangles, dividing the whole into additional four-sided parts. The meaning of dividing and splitting is included in the idea of li 理, for which the word ratio of the West may hold similar meanings. The concept of reason may come not only from its realistic departure from geometry but from the meaning of rationally diving one’s own portion. As it is rather difficult to clearly perceive one’s portion, it is understood/defined using the mathematical principles of li 理.
The world of li 理 is clear and simple and efforts to revert back to a modest state to remove uncertain obscureness is necessary. Designating x and y axes on a plane to find numerous rectangles by dividing and splitting a rectangular canvas can be considered a typical act of ratio, defying the unclear and ever changing characteristics of place. It can only be distinctively achieved upon a spatial layer of consistency.
Countless axes of x’s and y’s shoot across the space of awareness, layered upon Lee’s canvas. Depending on the range of axes you select the shape and layout of the colored rectangular planes are determined. But no matter what combination of four-sided shapes you come up with, bringing the color faces of perception and place up on to the spatial levels and into the state of openness proves to be what is so attractive about Lee’s work.
Lee’s work is simple and succinct. The solid structure and level of excellence stirs within us a level of integrity, elevating our awareness. The erected walls within the rectangles of place attempt to imprison thought while but as blockades that suggest space, they manage to free the mind. The release offered by such openness may be the reason that Lee’s work, usually art of stern and rigorous art, paradoxically raises not only an ordered state of awareness but offers a formative pleasure as well.

In Hwang, Art Critic